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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3.10 11:15 수정 : 2011.03.10 11:15

김조광수의 ‘마이 게이 라이프’

[매거진 esc] 김조광수의 ‘마이 게이 라이프’

어릴 적 우리 집은 가난한 편이었다. 이북에서 피난을 내려오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든든한 후원자가 계신 것도 아니었고 오로지 자수성가를 해야 했기 때문에 부자로 살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우리 4남매가 기죽지 않게 하려고 어려운 형편에도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쓰신 편이었다. 텔레비전도 전축도 전화도 동네에서 우리 집이 제일 먼저였다. 없는 살림에 쪼들려 살면서도 뭔가 새로운 것이 나오면 먼저 사셨고 그 덕분에 난 동네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곤 했다. 김일 선수의 레슬링 경기가 있을 때마다 우리 집에 가득 모여들던 동네 사람들의 풍경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4학년 겨울방학 때 아버지가 갑자기 우리들을 데리고 체육사에 가셔서는 스케이트를 하나씩 사주셨다. 지금은 스케이트 하나 사는 거야 대단히 큰 일이 아니지만 그때는 자기 스케이트를 가진 아이들이 거의 없었던 때라 우리들에겐 너무나 큰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형과 내게는 스피드 스케이트를 여동생에게는 피겨 스케이트를 사주셨다. 한창 자랄 때의 나이라서 엄마는 “내년이면 못 신을 텐데 사주지 말라”고 만류하셨지만 아버지는 껄껄껄 웃기만 하셨고 우리들은 행복한 비명을 질러댔다. 엄마의 말씀처럼 1년밖에는 못 신는 것이 되어 아까웠지만 그해 겨울은 스케이트 덕에 마냥 행복했다. 머리맡에 스케이트를 놓고 잠을 자며 행복해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서울 변두리에는 논이나 웅덩이에 물을 대 얼린 다음에 줄을 쳐놓고 스케이트장이라고 만들어 놓은 곳이 꽤 있었지만 우리 동네에는 스케이트장이 없어서 버스를 타고 멀리 가야 했던 터라 아주 많이 타지는 못했다. 친구들과 스케이트장에 가는 날에는 자랑거리가 하나 생기는 거라 유치하지만 약간 우쭐해하며 뽐냈던 기억도 있다. 스케이트를 지치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재미가 붙어 갈 때쯤 큰 고민이 생겼다. 여자아이들이 예쁘게 타는 피겨에 꽂힌 것이다. 피겨는 모양은 물론이거니와 색깔부터 스피드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흰색이나 분홍색 피겨는 내 맘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내겐 시커먼 스피드 스케이트뿐이었다. 한번은 피겨가 너무 타고 싶어서 돈을 주고 빌려 탄 적이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탓에 연방 엉덩방아를 찧어댔지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 가끔씩 피겨를 빌려 타는 날이 있었고 내가 스피드 스케이트보다 피겨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아버지께 다음에는 꼭 피겨를 사달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내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거의 매년 스케이트를 사주셨고 그때마다 난 간절히 피겨를 원했지만 내게는 “남자는 롱(스피드 스케이트를 그렇게 불렀다)을 타야 한다”는 단호한 말과 함께 까만 스피드 스케이트가 돌아왔다. 몰래 스케이트를 바꾸러 갔다가 차마 바꾸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며 눈물을 훔치던 기억도 있다. 아, 그때 아버지가 피겨를 사주셨다면 난 브라이언 오서처럼 되었을지도 모른다.

김조광수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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