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5.12 10:07
수정 : 2011.05.12 10:07
[매거진 esc] 김조광수의 ‘마이 게이 라이프’
어릴 때 가장 재미있었던 놀이는 소꿉놀이다. 다방구, 자치기, 술래잡기, 오징어. 놀이가 참 많았지만 소꿉놀이를 따라갈 순 없었다. 그런데 소꿉놀이는 남자아이들보다는 여자아이들 놀이였다. 하지만 난 소꿉놀이가 좋았다. 꼬마들이 어른인 척 연기를 하는 것이 좋았고 무엇보다 싸우거나 경쟁하지 않고 그냥 알콩달콩 살면 되는 놀이라서 좋았던 것 같다. 짝을 이뤄서 하는 놀이였던지라 난 인기가 꽤 많은 편이었다. 나를 차지하려고 여자아이들은 경쟁을 했고 때때로 가위바위보를 해야만 했다. 난 그렇게 뽑혀서 누군가와 짝을 이뤘고 가상의 부부가 됐다. 생각해보니 ‘우리 결혼했어요’와 비슷한 콘셉트였구나! 그래, 내가 재밌어할 만했어.
대부분의 소꿉놀이는 결혼 뒤에 벌어지는 가상부부 놀이였는데, 난 결혼식 하는 걸 좋아했다. 동화를 읽은 영향 때문이었는지 언제나 성을 만들었고 말을 타고 입장을 했다. 수많은 하객이 모여들고 팡파르가 울리고 축포가 쏘아지는 성대하고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만큼은 공주가 될 수 있었던 나의 짝꿍들도 너무나 좋아했다. 밥 짓고 상 차려서 맛있게 먹고 있던 다른 짝들도 다 우리를 부러운 눈으로 보았다. 행복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꼭 그렇게 결혼식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그 꿈은 산산조각 났고 우울해졌다. 난 신랑이 될 수 없었다. 신랑이 되려면 신부가 있어야 했는데, 난 신부와 짝을 이루는 이성애자가 아니었다. 세상은 이성애자들의 결혼을 축복했지만 나 같은 동성애자들의 결혼은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받아주지 않았다. 누구보다 행복한 결혼식을 꿈꿨지만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꿈 많던 사춘기에 게이 소년은 좌절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대학에 들어가 학생운동을 하면서 결혼제도가 가진 문제도 알게 되었고 꼭 결혼을 해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란 것도, 비혼이라는 단어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성애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결혼이란 것에 늘 목말랐다. 현실은 냉혹했다. 형과 여동생 둘, 친구들과 아는 이들이 결혼을 했고 난 언제나 결혼식을 축하해주는 하객으로만 있어야 했다.
커밍아웃을 하고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고 동성 연인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됐다. 그러는 동안 세상도 바뀌었다. 아직은 먼 나라 이야기지만 동성 커플의 결혼을 법적으로 보장하거나 파트너십을 인정하는 나라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최근 국민의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인 아르헨티나에서도 동성 결혼이 합법화됐다. 결혼은 이제 이성애자들만의 것이 아닌 게 됐다.
얼마 전에 내가 공개적으로 결혼을 할 거라는 기사가 나오면서 인터넷 검색어 순위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9살 연하와 결혼’한다는 것이 사람들을 자극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뜨겁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수많은 사람이 이메일로, 트위터로 축하의 인사를 보내줬다. 고마운 일이다. 아직 날짜를 잡은 건 아니지만 내년에는 나도 결혼을 할 것 같다. 꿈만 같다.
김조광수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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