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6.16 11:06
수정 : 2011.06.16 11:06
김종광수의 ‘마이 게이 라이프’
자, 미, 숙, 빈.
내가 회원으로 활동하는 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는 ‘이쪽’ 이름이 필요한 회원들에게 ‘자, 미, 숙, 빈’이라는 이름을 언니들이 하사한다. 조선시대 후궁들에게 내리는 첩지에서 따온 것 같은, 조금 유치해 보이는 우리들끼리의 이름 짓기 놀이라고 생각해주면 되겠다. 정확한 유래를 아는 이는 없다. 회원으로 가입해서 활동하는 기간에 따라서 처음엔 자기 이름 뒤에 자를 붙이고 3년 터울로 미, 숙, 빈이 된다. 회원이 된 지 10년이면 후궁 최고의 첩지인 빈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나름 연구를 많이 했음직한 놀이다. 그래서 난 처음 나갔을 때 광자였고 아직 10년이 채 안 되어서 빈을 달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빈을 달고 있는 친구들은 꽤 여럿이다. 친구사이가 세상에 이름을 내밀고 나온 게 1994년이니까 얼핏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처음에 친구사이를 만들 때는 빈을 달고 활동하는 회원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동성애자인권운동이란 것 자체가 낯설었고 지금보다 사회적인 편견이 훨씬 심했으니 10년 이상을 버티며 활동을 할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자, 미, 숙, 빈’에서 멈추고 그 이상이 없다. 터울도 3년이 고작이라서 10년이 넘은 회원들은 모두 빈이다. 빈을 달고도 한참을 더 활동하고 있는 언니들이 이렇게 많을 줄 알았다면 아마도 다른 칭호를 만들어 놓았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게 없다. 처음엔 10년만 해도 대단한 거라고 생각했던가 보다.
지난 토요일 밤에는 친구사이가 공동제작한 다큐멘터리영화 <종로의 기적>을 홍보하기 위한 번개가 있었다. 영화의 주무대인 종로3가 낙원동 일대의 포장마차와 게이바 그리고 이태원의 클럽을 돌면서 전단을 나눠주고 영화 보기를 독려하기 위한 애칭 ‘<종로의 기적> 수호선녀단’ 활동이었다. 토요일 밤 10시에 사무실에 모여서 종로부터 돌고 나서 술 한잔 걸친 뒤 12시 땡 치면 이태원을 도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날 번개는 빈들의 잔치였다. 열 명이 채 안 되게 모인 회원들 중 40대 이상의 언니들이 반을 훌쩍 넘긴 것. 아직 빈을 못 단 몸이지만 나이로는 내가 왕언니였고 나를 빼고 빈이 다섯이나 되었다. 평균연령 마흔 이상이니 말 다한 거다. “어머 어머, 뒷방 언니들 너무 부려 먹는 거 아니니?” 이런 소리가 절로 나왔다. 말만 그렇지 이 언니들이 또 힘은 넘쳐서 낙원동 일대의 게이바를 군소리 없이 열심히들 돌았다.
빈들이 뜨면 좋은 점이 많다. 경험 많은 언니들은 뭘 해도 빠르고 정확하고 빈틈이 없다. 그러니 어떤 일을 맡겨도 안심이 된다. 지난 주말처럼 게이바를 도는 일이면 더더욱 그렇다. 데뷔한 지 10년이 넘은 언니들이라 낙원동 뒷골목에 숨어 있는(?) 게이바까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 지도도 필요 없는 게이 내비게이션들이다. 작년부터는 ‘언니장학회’를 만들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동생들을 돕고 있다. 친구사이를 받치고 있는 든든한 언니들이다.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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