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9.22 10:39
수정 : 2011.09.22 11:41
[esc] 김조광수의 ‘마이 게이 라이프’
어? 언제 저기 앉아 있었지? 지하철 건너편 자리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딱 내 스타일.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얼른 소설로 눈을 돌렸다. 이런, 소설 속에서 그가 웃고 있다. 허걱. 뭘까? 저 레이저의 정체는? 몇 번을 검색해도 ‘애. 정. 충. 만’이라고 나온다. 오케이! 내 상태도 나쁘지 않으니 일단 접수한다.
모른 척 힐끗 쳐다본다. 그도 나를 본다. 어쩜, 이렇게 호흡도 척척인가. 10점 만점에 10점! 보고 돌리고 또 보고 돌리고 또 보고. 그렇게 탐색전을 벌이는 사이 열차는 을지로3가역에 도착한다. 어쩌나 나는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한다. 초조해진다.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일단 책을 가방에 넣는 걸로 ‘나 다음에 내려요’ 사인을 보낸다. 열차는 종로3가역에 도착하고 가방을 챙겨 일어선다. 출입문 쪽으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어? 그가 따라오지 않는다. 뭐지? 내 계산이 틀렸나? 출입문이 열린다. 내 신경은 온통 뒤통수 저편 그에게로 쏠린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아, 어떡해? 몰라 몰라.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 정면승부! 뒤돌아 그의 앞에 선다. 올려다보는 그의 눈망울이 아름답다. 그러나 시간도 열차도 달려 종착역에 오는 동안 말 한마디 붙이지 못했다. 그사이 휴대전화는 계속 울어댔다. 구파발역에 내린다. 사람들은 출구를 향해 움직이지만 난 반대편 플랫폼으로 향한다. 이게 무슨 망신이람. 그런데 웬걸? 그가 나를 따라 움직인다. 그렇게 그를 만났다.
그는 급하게 출장을 가야 하는데 나 때문에 구파발까지 왔단다. 마주보며 웃었다. 2박3일 일정인데, 혹시 괜찮으면 같이 가잔다. 이렇게 헤어지면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러자고 했다. 친구들은 오늘이 아니어도 또 만날 수 있잖아. 그는 짐을 챙겨 오겠다고 떠났고 혼자 남았다. 30분이 지났을까? 그에게 문자가 왔다. 자기를 보고 웃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나에게 오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지 않겠다고 했다. 뭔데 그래? 일단 무조건 예스다. 예스! 보내기가 무섭게 빵빵. 용달보다 작은 트럭을 타고 그가 왔다. 귀엽다.
뚜껑 열리는 빨간 스포츠카는 아니었지만 그와 함께한 2박3일은 꿈만 같았다. 건축자재 납품업체 영업사원의 지방출장치고는 꽤 근사한 도시를 돌았다. 경주를 거쳐 부산까지. 서울로 돌아와 톨게이트를 지날 때 그가 말했다. “사실은 나 결혼했어.” 그걸 왜 이제 말해. 처음에 얘기했어야지. 그랬으면 따라가지 않았을 거 아냐!
며칠 뒤 그는 핼쑥해져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다 선봐서 결혼을 했는데, 잠자리가 좋지 않았단다. 이상해서 친구들에게 물었더니 다들 그러고 산다는 답을 들었고 친구들 손에 이끌려 성매매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남자를 만나고 나서야 게이라고 자각을 했다 한다. 그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부인에게 고백하고 이혼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게이로 살지 않을 수도 없다고 했다. 자기를 붙잡아 달라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냉정히 돌아섰다. 그 후로는 소식을 모른다. 그가 이혼을 하고 게이로 잘 살고 있기를 바란다.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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