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0.10.21 13:21 수정 : 2010.11.25 15:09

[매거진 esc] 탁정언의 ‘관계를 푸는 언어의 기술’

“사랑해. 우린 한 몸이 될 거란다.” 나는 아침저녁 물에 담긴 당근 밑동에게 한마디씩 말을 건넸다. 아내는 농약을 친데다 방사선 처리했을 묵은 농약 당근에게 허튼짓을 한다고 핀잔을 주며 유기농 당근만 사랑했다. 나 역시 비관적이기는 했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날마다 진심을 담아 당근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카피를 선사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플라스틱처럼 무생명한 몰골을 하고 있던 당근이 드디어 조심스럽게 푸른 싹을 내미는 게 아닌가?

우리는 말이 모양이나 형태가 없어서 내뱉는 즉시 연기처럼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은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뿐이지 진동하는 파동이자 에너지로 주변의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말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말은 특히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부부 사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고통을 주는 나쁜 에너지로 작용한다면, 상대의 뇌는 진화의 시간 저편으로 되돌아가 한 마리 도마뱀으로 변신하고 무서운 독을 내뿜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부와 명예, 지위, 미모 같은 세속적 가치로는 쉽사리 회복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부부 사이에 말을 할 때 너무 간지러워서 피부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닭살전략’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닭살전략’을 사용한다는 것은, 말 한마디에 의해 언제든지 독을 내뿜을 준비가 되어 있는 편도체라는 뇌 속 한 부위를 자극하지 않는 것이다. 언제든지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는 편도체가 터진 뒤에는, 아무리 근사한 레스토랑의 분자요리라 해도 위궤양의 병인이 되며, 볼쇼이 백조의 호수를 복수의 호수로 만들며, 칠성호텔의 특급침대를 불면의 형장으로 바꿔버릴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사랑해, 네가 곧 내가 될 거란다.”

시간에 쫓겨 이 글을 다듬고 있는 지금 아내는 현미를 발아현미로 만들기 위해 무표정한 현미 쌀에게 닭살 돋는 말로 대화를 하는 중이다. 나는 그런 아내를 보면서 한참 웃고 있다. 내가 보기에 부부란 말을 통해 뉴런이 변화하고 나중에는 유전자까지 닮아가는 사이다.

탁정언 카피라이터


■ 전쟁보다 무서운 재정적자…‘대영제국 상징’ 항모 퇴역
■ “오늘 하루 당신이 충남도지사”
■ 칠레 광산 붕괴 예고된 인재?
■ 김황식 총리 노인 무임승차가 응석받이 달래기?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탁정언의 ‘관계를 푸는 언어의 기술’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