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11.18 11:11
수정 : 2010.11.25 15:08
[매거진 esc] 탁정언의 ‘관계를 푸는 언어의 기술’
회의실 분위기가 살벌했다. 조금이라도 자극을 가했다가는 대폭발을 할 것 같았다. 모두들 최대한 인상을 구긴 채 한쪽 벽에 잔뜩 붙어 있는 드래프트(광고 표현물)들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높은 사람이 드래프트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을 가했다. 스태프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 잘못이 아니다, 그럼 누구 잘못이냐, 윗선에서 데려온 외부 전문가가 다 한 거 아닌가, 당신들은 뭘 했느냐, 우리에겐 책임이 없다, 그럼 월급은 왜 받느냐…. 서로 책임을 전가하느라 목소리를 험악하게 높였다. 그러다 일제히 또다른 외부 전문가인 나를 노려보았다.
“저 문제의 드래프트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높은 사람이 나에게 평가를 강요했다. 그는 나에게서 희생양을 찾고 있는 듯했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들 험한 수준에서 감정적으로 대응을 한다면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이 뻔해 보였다.
나는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는 ‘현자처럼 말하기’가 최고의 지혜라는 걸 숱한 실수를 통해 터득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현자처럼 말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나는 바보다”라는 말씀을 되뇌었다. 현자처럼 나는 바보라고 내 입으로 말을 한다면? 그들 머릿속에서 거울신경세포(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가 자극을 받고 적개감이 풀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왜냐하면 바보들은 재주가 없어 열심히 일하고, 별거 아닌 일에도 감사하고, 생색내야 할 때도 뒤로 물러서서 자비심을 일으키니까.
“나는 정수기에 대해 모릅니다.” 최대한 나를 낮춰서 간단하게 대답했다. 프로젝트 참여를 포기한다는 뉘앙스로 받아들여도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러자 0.5초 정도 잠시 침묵이 흘렀고 곧 대폭소가 터졌다. 높은 사람이 허허 웃으면서 “오리엔테이션 충분히 잘 해드리고 처음부터 제대로 다시 시작합시다”라고 부추기며 회의실을 나갔다. 스태프들도 나 못지않은 바보가 되어 의심과 견제, 적대감을 풀고 자신들이 처한 최악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로운 일,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탁정언 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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