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1.20 14:17
수정 : 2011.01.20 14:17
[매거진 esc] 탁정언의 ‘관계를 푸는 언어의 기술’
“도대체 왜 그래? 문제가 뭐야?” 친구의 다그치는 목소리가 안방 문을 넘어 거실까지 들려왔다. “뭐가 문제라니? 뭐가 문젠지 거울을 봐!” 곧 친구 아내의 목소리가 무섭게 폭발했다. 친구의 아내는 바람처럼 안방을 나와 다른 방으로 사라졌다. 친구 말만 듣고 밤늦게 술에 취해 방문한 것이 잘못이었다. 친구와 나는 집을 나와 동네 허름한 술집에서 속을 풀었다. 친구는 소주 한 잔을 쭉 들이켜고는, 다그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 헛나왔다고 후회했다. 아양과 애교를 섞어 아내의 주특기인 순대볶음 안주를 부탁하려 했는데, 그만 뾰로통한 표정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번 토라지면 며칠씩 풀어지지 않는 아내와의 관계를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부부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알 것이다. 의도하지 않았던 말이 함부로 튀어나와서 관계를 해치게 되는 사건 말이다. 내 입으로 내가 말을 하는데 왜 엉뚱한 말이 튀어나오는 것일까? 기분, 감정, 마음, 뇌, 신경, 세포, 염색체까지 들어가 보면 존재한다는 이기적 유전자가 몸과 마음을 프로그램해서 제어하고 조정을 하기 때문(리처드 도킨스)이라는 주장이 사실이면 좋겠다. 그러면 모든 걸 이기적 유전자 탓으로 돌리고 말실수 정도는 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이기적 유전자의 예측과 기대를 넘어서 필요에 따라 출산을 억제하기도 하고 또 말의 습관을 의식적으로 바꿔 개인의 운명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유전공학을 이용할 필요도 없이 선인장에게 사랑의 언어를 지속적으로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방어기제를 해제시켜 가시 없는 선인장 종을 탄생시켰다는 인도 식물학자의 이야기(한의사 김홍경)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꼬인 관계를 풀려는 조급함, 다그침, 악착같음은 관계에 가시를 돋게 한다. 반면에 사탕발림같이 유치하다 해도 사랑과 용서의 말이 반복되기만 해도 마음이 바뀐다. 친구는 계속해서 아내에게 문자를 날렸다. 그래도 안 되는구나, 허전하고 찝찝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친구의 아내로부터 답장이 왔다.
“안주 만들어놨으니까 친구랑 같이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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