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4.21 11:11
수정 : 2011.04.21 11:11
[매거진 esc] 탁정언의 ‘관계를 푸는 언어의 기술’
“당신이 슬프면 나도 슬픕니다. 당신이 웃으면 나도 웃어요.”
나는 소피 마르소를 닮았다는 한 여성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다. 그러자 즉시 답장이 온 모양이었다. 시간차 다중인격자였던 선임 상병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어리바리 보충병에게 다시 또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편지를 쓸 것을 명령하였다. 답장도 보여주지 않고서.
그녀는 편지 행간에 걸쳐 있는 마음을 읽는 투시력을 갖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강요와 위협에 못 이겨 편지를 쓰는 억울함과 울분, 분노, 더 나아가 분단국가에 사는 사무친 한까지 귀신같이 읽어냈다. 비참함과 악감정이 행간에 살짝 비치면 그녀는 즉각 반응을 보였고, 그 바람에 나와 동기들까지 시간차 생트집에 붙들려 혹독하게 당해야 했다. 나는 그녀의 신들린 행간 감정 포착능력 덕분에 진짜 사랑을 담아 편지를 대필해야 하는 고역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행간에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던 걸까? 한참 세월이 흘러 말과 글로 먹고사는 프로가 된 뒤, 언어는 말이든 글이든 모두 진동하는 에너지(에모토 마사루)이기 때문에 미묘한 기운으로 남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별히 민감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행간의 느낌을 알아챌 수 있다는 걸 진작 알았더라면 항명죄로 피 터지게 두들겨 맞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요즘처럼 전자우편, 문자 메시지, 웹 메신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로 사랑을 주고받는 세상이라면 연애편지 아니 연애문자 대필은 상상도 못할 일일 것이다. 즉각 문자로 반응하면 될 일을 무슨 대필이 필요하겠나? 그런데 컴퓨터, 휴대폰, 스마트폰 화면에 뜨는 문자도 진동하는 에너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문자를 보내는 사람의 기분과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연애편지처럼 고치고 다듬을 필요는 없겠지만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에 한번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당신이 슬프면 나도 슬프고 당신이 기쁘면 나도 기쁘다.” 옛날 군대 생각을 하며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자 즉시 답글이 왔다. “술 취했어?”
탁정언 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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