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5.05 10:13
수정 : 2011.05.05 10:13
[매거진 esc] 탁정언의 ‘관계를 푸는 언어의 기술’
“걔 성격이 쿨~해서요.” 새파란 술자리 동반자는 성격 문제로 연인관계를 청산했다는 이야기를 꺼내 서먹서먹하던 비즈니스 술자리 도입부 대화에 불을 붙였다. 그래 성격이 중요해, 성격이 서로 맞아야 사랑이 결실을 맺지, 헤어질 때는 깨끗하게 헤어지는 게 좋아 잘했어. 술자리에 합석한 모두들 술과 함께 한마디씩 도움말을 건네자 곧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고 어느새 동지가 되었다.
그런데 술이 얼큰하게 오르자 분위기가 갑자기 까칠해졌다. “그 주제에 건방지기는!” 그가 말끝마다 ‘주제에’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덧붙이면서 헤어진 상대에게 험담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는 게 병이라고, 나는 ‘주제에…’라는 말의 위험성에 몸을 움츠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 한마디 말은 사람의 에너지를 몽땅 빨아먹어버리는 무시무시한 흡혈귀였다. 신입사원 주제에, 만년 과장 주제에, 노래도 못하는 주제에, 가방끈도 짧은 주제에, 돈도 없는 주제에, 변두리에 사는 주제에…. 아무 말이나 갖다 붙이기만 하면 무한대로 확장하는, 무시무시한 ‘주제에’라는 괴기명사가 일단 말에 끼어들기 시작하면 사람의 기운을 몽땅 빼앗아버리고 관계를 영락없이 깨뜨려버린다. 또 그 정도로 끝나지 않고 한 개인의 인생을 파멸로 몰고 가기까지 한다. 내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제에…’라는 괴기명사 한방에 무능력자로 무릎을 꿇었고, 소중한 연인관계가 깨졌으며, 부부관계는 파경의 길로 내몰렸던가.
그는 계속해서 ‘주제에’를 남발하며 사랑이 깨진 이유를 쿨하다는 상대의 성격 탓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모든 문제를 성격 탓이라고 몰아붙이지만, 전문가들이 성격 대부분은 조건화된 반응, 두려움, 신념들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으며(에니어그램 학자 돈 리처드 리소, 러스 허드슨), 성격은 마음이 습관적으로 쌓아올린 허상의 구조물로 자신의 일부분이지 전체가 아니라고 강조하는 주장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의 ‘걔’가 쿨해진 것도 ‘주제에’라는 무서운 흡혈귀를 남발했기 때문이 아닐까? 성격 때문에 사랑이 깨지는 게 아니라 성격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끝>
탁정언 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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