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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얼마든지 끓여줄게. 사진 황선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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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싱글 앤 더 시티
7월인가 8월분 도시가스 요금이, 3000원인가 4000원인가가 나왔다. 샤워할 때 보일러로 물을 데운 게 딱 그만큼이었을 거다. 고향집 어머니가 읽으면 기함할 얘기지만, 난 집에서 밥을 안 해 먹는다. 혼자 살면서도 끼니를 곧잘 챙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 칼럼을 번갈아 쓰는 <씨네21>의 김도훈 기자는 오밤중에 부챗살을 굽고 청경채를 볶아서 어엿한 상을 차려내곤 한다. 더 부러운 건 그 부지런함보다 그렇게 먹고도 살이 안 찌는 체질이지만. 집에서 요리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 먹는 게 더 맛있으니까. 파스타를 볶으면 블루밍 가든의 성게알 스파게티가 생각나고, 덮밥이라도 만들면 돈부리의 에비돈이 떠오르며 현실이 궁색해진다. 엄마와 살 땐 호화로운 식탁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혼자 살면서는 맛있는 바깥 음식을 너무 많이 맛봤다. 매번 사 먹으면 비싸지 않냐고? 요즘 장 봐서 밥 해먹어 본 사람이면 그런 말 못 할 거다. 게다가 1인분은 버리는 재료가 더 많으니 여러모로 낭비. 결정적으로 나는 내 요리 실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만큼의 겸손함도, 그게 나아질 만큼 기다려줄 인내심도 없다.
스스로 만든 음식을 내어오고 함께 먹는 일은 특별한 친밀감을 식탁 주변에 둘러준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라면 먹고 갈래요?”에서 확인한 바 있듯이, 뭔가 함께 먹자는 제안은 작업에서 노골적인 냄새를 덜어주는 효과적인 탈취제다. 요리 잘하는 싱글이란 참 매력적이다. 자신의 부엌, 그리고 요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은 섬세함과 자상함을 어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기도 하고. 하지만 나처럼 유통기한이 가물가물한 뭔가로 냉장고가 가득 찬 여자에게, 만나는 남자가 자꾸 요리를 해달라고 조른다면? 청문회를 앞두고 잔뜩 켕기는 고위공직 내정자의 기분밖에는 안 든다. 얼마 전 가로수길에는 핀란드 브랜드 마리메코가 매장을 열었다. 나는 여기서 거금 12만원을 들여 예쁜 찻주전자를 하나 샀다. 내 부엌이 든든해졌다. 비싼 속옷 입고 데이트 나갈 때처럼 당당하다. 제발 요리 해달라는 말은 하지 말아줘, 대신 차는 얼마든지 끓여줄게.
황선우/<더블유 코리아>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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