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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1.27 14:28 수정 : 2011.01.27 14:28

순댓국. <한겨레> 자료사진

[매거진 esc] 황선우의 싱글 앤 더 시티

“겨울이 너무 짧아 즐길 시간이 부족하니, 스키 좋아하는 마음을 줄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사장님의 트위터에서 이런 요지의 글을 봤다. 스키를 안 타서 그런지 내 겨울은 참 길기만 하다. 아래층 배수관이 얼어 세탁기를 못 돌리고 대신 손빨래를 하는데 긴 겨울 덕분에 길라임 못지않은 팔근육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 폭설이 내린 일요일 저녁 고요한 동네엔 서거걱 뿌드득 눈 치우는 소리만 들렸다. 나도 옥탑 계단에 쌓인 눈을 쓸며 다시 팔근육을 다졌다. 겨울이 이만큼 길고 추운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스키를 타지 않았지만 고장난 보일러나 무서운 도시가스 요금, 얼어버린 수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던 시절엔 그랬다.

순댓국을 먹기 시작한 건 겨울이 유독 추워지면서부터다. 서른 전엔 ‘돼지는 물에 빠뜨리지 않는다’는 게 내 식생활의 원칙이었다. 구워 먹는 게 더 맛있으니까. 고기 노린내가 나는 걸쭉한 국물, 숭덩숭덩 썰어넣은 기름진 돼지 부속을 왜 먹는지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인생에 순댓국이 들어왔다. 안 먹던 음식을 시켰던 걸 보면 뼛속까지 오한이 들고 몹시 배가 고프던 날이었을 거다. 뜨거운 국물에 들깻가루를 소복이 떠넣고 된장 찍은 양파를 순대에 올려 뚝배기 바닥이 보일 때까지 싹싹 긁어 먹었다. 세상에, 너무 맛이 있었다. 웅크리고 굳어 있던 몸 구석구석까지 더운 기름기가 돌며 연해지는 기분이었다.

황선우 <더블유 코리아> 피처 에디터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면 길에 가방 멘 초딩들만 보인다더니, 순댓국을 먹기 시작하니 서울 시내가 온통 순댓국집 천지였다. 도도한 청담동 골목에도, 흥청대는 홍대 거리에도 순댓국집은 등대처럼 불을 밝히고 있었다. 밤바다를 표류하는 통통배처럼 나는 그 불빛에 늘 이끌린다.

거기서는 혼자라도 외롭지 않다. 홀로 식사하는 사람들이 유독 많기 때문이다. 싸고 든든하게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메뉴고, 혼자인 사람이 고기 단백질을 취할 수 있는 실속 있는 방식이다. 혹시 품위를 위해 순댓국의 세계에 발을 디디지 못한, 그래서 춥고 배고픈 싱글 여성이 있다면 귓가에 속삭여주고 싶다. ‘순댓국 믿고 구원 받으세요.’ 겨울은 여전히 길지만, 나에게 순댓국이 없었다면 특히 망원동 ‘순대일번지’가 없었다면 봄이 행하는 기적조차 잊어버렸을 것이다.

황선우 <더블유 코리아>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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