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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3.17 11:01 수정 : 2011.03.17 11:01

‘질샌더 유니클로’ 혹했으나

[매거진 esc] 김도훈의 싱글 앤 더 시티

봄이 왔다. 겨울옷을 모두 드라이클리닝한 뒤 서랍장에 집어넣을 계절이 왔다는 소리다. 작정을 하고 드레스룸(이라고 쓰고 ‘옷 무덤’이라 읽는다)으로 사용하는 작은 방에 들어가자 눈앞이 캄캄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개인적으로 검은색이 아니면 옷이 아니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터라 행거에 걸려 있는 건 모조리 검은색 옷뿐이다.

둘째. 겨울 내내 한번 입고 집어던져놓은 옷들이 차곡차곡 쌓여 검은 산을 이룬 꼴을 보고 있노라면 눈앞은 절로 캄캄해진다. 어찌 되었건 할 일은 해야 했다. 검은 산을 해체해서 드라이클리닝할 것과 그냥 쑤셔넣을 것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 유령처럼 걸려 있는 검은 재킷 무리들을 보자마자 추억이 떠올랐다. 2009년 10월 아침 9시30분. 나는 이 칼럼을 함께 쓰고 있는 황선우 에디터와 명동으로 향했다. 디자이너 질 샌더와 유니클로가 컬래버레이션(협업·합작)한 ‘+J 라인’이 국내에 입점되는 날이었다. 매장 개장은 11시30분. 조선 팔도에서 몰려든 패셔니스타들이 이미 긴 줄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마침내 매장의 문이 열렸다. 마음에 담아뒀던 재킷은 1분 만에 동이 났다. 전쟁터였다. 모두가 미친 듯이 바구니에 ‘10분 전만 해도 옷이라 불리었으나 천 덩어리가 되어버린 무언가’를 꾸역꾸역 쑤셔넣으며 좀비 같은 눈동자로 좋은 아이템을 선점한 다른 손님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검은 재킷과 코트를 한벌씩, 셔츠를 네벌 샀다. 노르망디 해변에서 살아남은 일병 라이언처럼 기뻤다.

그렇게 쟁취한 옷들이 어떻게 됐느냐고? 나는 그 장렬한 전리품들을 지난겨울에 단 한번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검은 산 아래 주저앉아버렸다. 2년 전에 딱 한번 입은 뒤 기억 너머로 잊혀진 피코트는 보풀이 일어 엉망인데다 어딘지 모르게 좀도 슨 것 같았다. 심지어 셔츠 한벌에는 여전히 태그가 붙어 있었다. 그 옷들을 사던 당시에 나는 질 샌더의 제품을 구입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손에 들어온 옷들은 결국 빠르게 기억 속에서 잊혀질 패스트 패션의 망령이었던 것이다. 한철 지나면 돌아보지 않을 옷들을 더이상 구입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면서야 나는 조금 더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이 서른여섯에.

글·사진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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