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3.31 10:36
수정 : 2011.03.31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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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닥쳐도 나는 화장하리. M.A.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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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황선우의 싱글 앤 더 시티
일본 대지진의 여파는 여전히 진행중이지만, 몇 주 전 처음 발발 때의 충격은 엄청났다. 바다 건너 이곳에서도 다들 근심을 나눠 가졌지만, 이 칼럼을 번갈아 연재하는 김도훈 기자의 경우 도쿄에 가까운 친구가 여럿 있어 특히 더 걱정이 깊었다. 몇 차례 건너서 이야기를 건네듣던 친구 ‘이즈미 상’과는 수시로 통화하며 안전을 확인하고 격려하는 모양이었다. 암흑의 주말이 지나 일상이 재개되었다.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한동안은 친구들과 함께 지낼 거라면서, 이즈미는 그 와중에도 화장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럴 때일수록 예뻐 보여야지.” 그 얘기를 전해듣고 나는 한번 만난 적도 없는 이즈미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일 지구가 흔들릴지라도 오늘 아이라인을 그리는 여성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처연한 긍정의 기백을 떠올리면서 가슴 한켠이 찡했다.
많은 남자들은 스모키 메이크업을 이해하지 못한다. 눈두덩을 검게 그리고 나가면 무섭다거나 ‘세 보인다’는 반응이 돌아온다. 도드라지는 레드 립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자들의 메이크업은 단지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시각적 아부가 아니다. 스스로를 아름답게 꾸미는 본능이자 매일 조금씩 연마하는 장인의 기술이며, 그날의 일정을 준비하는 마음의 의식인 동시에 자신감을 고양시키는 심리 테라피다.
내 경우 가장 좋아하는 메이크업의 단계는 아이라인과 블러셔다. 아이라이너는 또렷한 인상과 함께 섹시하고 강한 여자가 된 기분을, 블러셔는 상기된 뺨과 더불어 소녀의 무드를 느끼게 한다. 이미 환갑잔치 할 때까지 바를 만큼 화장품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새로운 시즌의 컬러 팔레트를 외면하지 못한다. 그걸 멈추는 순간 여자로서 즐길 수 있는 놀이가 하나 줄어들 것이다.
파운데이션을 톡톡 두드린다, 아이라인을 쓰윽 뻗어 그린다, 속눈썹을 뷰러로 집어 올린다. 거울 속의 나와 눈을 마주치고, 마음에 드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세상에 나가 싸우고 사랑할 준비를 마친다. 그렇게 여자의 하루는 시작된다. 이즈미들이 화장하는 동안, 지구에 희망은 있다.
황선우/<더블유 코리아>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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