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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2.01 14:32 수정 : 2011.12.01 14:32

황선우의 싱글 앤 더 시티
임시 천국에서의 한 주, 아이처럼 지내도 아이가 될 수는 없네

여름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갑자기 생긴 일주일의 휴가, 급격히 추워진 서울의 날씨, 쓰지 않고 남아 있던 카드사 제공의 동반자 1인 항공권…. 모든 상황이 떠나라고 어깨를 떠미는 것 같았다. 최근 회사를 그만둔 친구에게 제안했다. “내가 비행기표 댈 테니까 네가 호텔 예약할래?” 거래가 이뤄졌고, 싱글 여자 둘은 사이판으로 떠났다.

가능한 비행기표가 거기뿐이라 고민 없이 택한 행선지였지만, 사이판은 유행이 한참 지난 휴양지답게 아무것도 볼 게 없었다. 10여년 전 처음 휴가를 왔을 때 그대로다. 세상이 변한 속도와 정도를 생각하면 오히려 퇴행했다는 게 맞겠다. 다국적기업 유명 브랜드의 풀 빌라 리조트 같은 건 들어와 있지도 않고, 평점이 가장 좋은 곳으로 골라서 갔음에도 리조트는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60년대 미국 시골 같은 쇠락한 휴양지의 초라함마저 푸근하게 느껴지는 건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기 이전의 나이브한 분위기가 감돌아서였다. 화려한 서울의 미친 속도를 벗어나, 딱딱하고 볼품없는 플라스틱 선베드에 드러누워 있노라니 마음이 녹아내렸다. 고민할 일이라고는 양어깨를 균일한 색으로 태우는 일뿐이었다.

미국령인지라 느끼한 미국 음식을 주로 판다. 친구는 끼니 때마다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중학교 때 학교 앞 경양식집에서 팔던 1300원짜리 감자튀김이 너무 맛있는 거야. 그걸 하루에 한번밖에 먹을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퍼서, 어른이 되면 하루 세끼 감자튀김을 먹겠다고 결심했어.” 온갖 방식의 유행하는 다이어트를 다 시도하는 친구지만 여행 와 있을 때만큼은 맘대로 지내고 싶다고 말하며 케첩을 눌러 짰다. 나 역시 느지막이 일어났고, 점심 뷔페에서는 좋아하는 망고만 골라 먹었다. 아무 책이나 읽고 싶은 만큼 읽다가 손에 쥐고 잠들었다.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매일 이렇게 살면 좋겠어!”

아이가 있어서 맘대로 떠나지 못하는 처지도 아니고, 남편과 휴가를 맞추려 1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도 아니고, 살벌한 계절을 피해 여행할 만큼은 돈도 번다. 무엇이 나를 즐겁게 할지 뚜렷하게 알고 있다. 어른이 된 것, 그리고 30대 싱글로 지내는 것의 가장 좋은 점은 (누구에게 피해주지 않는 선에서) 얼마든지 아이처럼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중학교 때 품었던 ‘감자튀김 세 끼 식사’의 꿈이 이뤄지는 것처럼.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신문을 훑어보았다. 영하의 날씨에 시청 광장에서 시민들에게 물대포를 쏘았다는 소식을 읽고, 여름에 머무르고 싶던 마음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어른이 아이처럼 지낼 수는 있지만, 시간을 돌이켜 아이로 돌아갈 수는 없다. 여행지의 임시 천국 같은 풍경도 내가 사는 익숙한 지옥을 바꾸어놓지는 못한다. 당분간 감자튀김은 먹지 않기로 했고, 두툼한 패딩을 하나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시청 앞에라도 한번 나가 볼 테니. 적어도 서울에서 어른으로 사는 건 망고와 감자튀김 외에 많은 것을 견뎌야 하는 일이다.

글·사진 <더블유 코리아>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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