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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김도훈의 싱글 앤 더 시티
술맛 모르던 내게 새로운 세상 열어준 막걸리의 매력술맛을 모른다. 아니, 술맛을 모르는 유전자를 타고났다고 표현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이리라. 가벼운 칵테일 한잔에도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른다. 소주는 3잔 정도 마시면 거의 인사불성 상태가 된다. 한여름에 시원하게 목으로 넘기는 맥주맛. 나도 그런 걸 좀 알고 싶다. 맥주 500㎖를 벌컥벌컥 들이켰다간 머리뼈의 온도가 S사의 노트북처럼 달아올라 좌뇌와 우뇌가 피자 위 모차렐라처럼 녹아서 하나로 합쳐질지도 모른다. 농담이 아니다. 평소에 내 글이 참으로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독자라면 한여름 에어컨 없는 골방에서 시원한 맥주 원샷을 권하는 게 가장 좋은 암살 방법이라고 살짝 귀띔해 드리고 싶다.
나도 연습깨나 했다. 대학 시절엔 부러 선배들을 쫓아서 이런저런 술자리를 다녔다. 선배들 앞이라면 술을 무조건 마셔야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주량도 늘어나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웬걸. 주량은 늘지 않았다. 늘어난 건 하루 종일 먹은 탄수화물을 식도를 통해서 바깥으로 다시 배출해내는 횟수였다. 그 덕분에 내가 군살 하나 없는 몸매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아시다시피 여러분, 탄수화물은 다이어트의 가장 강력한 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못하면서 어떻게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느냐고 의아해했다. 술이야말로 사회관계를 위한 윤활유라고들 했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나로서는 괜한 심술이 치솟았다. 얼마나 유약한 사람들이길래 술의 힘을 빌려야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느냔 말이다. 개미가 빨아먹는 진딧물 배설물만큼도 술을 못 마시는 남자가 무리없이 이 ‘룸살롱 소사이어티’에 적응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어. 그렇게 다짐하며 살았다. 다짐은 금세 끝이 났다. 우연히 마트에서 구입한 막걸리 한병 때문에 나는 막걸리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주거니 받거니 얼큰하게 마시는 막걸리의 매력이 아니라 자기 전에 홀로 마시는 막걸리의 매력 말이다.
혼자 마시는 막걸리는 우아해야 한다. 새벽이 오면 나는 핀란드산 빈티지 그릇에 막걸리를 따른다. 일본 막걸리 광고의 장근석처럼 우아한 손길로 막걸리를 따른다. 세심한 손길로 아카시아 벌꿀을 한 스푼 투여한 다음, 와인을 마시듯 음미하며 목구멍에 부어넣는다. 밤마다 꿀막걸리에 취해 잠들면서 술 따위가 어떻게 관계의 윤활유가 되냐던 나의 오랜 편견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술은 정말이지 적절한 관계의 윤활유가 될 수 있었다. 남과 나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나의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윤활유 말이다. 사실 자라면서 우리는 정말로 까다롭고 또 좀처럼 타협할 수 없는 대상은 남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새벽에 홀로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하루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나 자신과 타협할 수 있는 꿀 탄 윤활유를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글·사진 김도훈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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