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3.03 10:17
수정 : 2011.03.03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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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씨의 서류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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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홍석우의 스트리트/스마트
단정한 머리 어울리는 빈티지 웹사이트 운영자 유준
디터 람스라는 걸출한 산업 디자이너가 있다. 고즈넉한 통의동 자락 대림미술관에서, 20세기 중후반을 점령한 그의 작품들로 3월 말까지 전시를 연다. 전시는 미술관 전체를 사용하는데 4층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구조다. 커피잔이니 계산기니 하는 것들을 빼어난 예술품 보듯 하는 게 혹자에겐 웃길지 모르지만 그곳은 간결한 아름다움의 원칙을 적용해 공산품으로 빚어낸 디자이너에게 호감 있는 이들이 모인 곳이다. 지난 토요일 그 아름다움에 새삼 감탄하며 계단을 내려오다 눈에 띄는 남자를 만났다. 새빨간 재킷에 흰 셔츠와 줄무늬 니트를 입고 다리에 착 감기는 회색 울 바지를 입은 그는 벌써 몇 년째 친구인 유준(27)이었다. 1년 만에 만난 그는 단정하고 수수한 멋이 있었다. 캔버스 소재의 파란 가방과 회색 스니커즈는 어떤 의미에서 화룡점정이었다.
그는 현재 친구 두명과 함께 빈티지와 세컨드핸드(중고) 의류를 다루는 웹사이트를 운영한다. 그 자신과 여자친구 김지혜가 모델을 한다. 하나뿐인 옷들을 갖고 만든 스타일링은 온전히 그들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 “제품 선택부터 촬영 콘셉트까지 함께 나눠요. 스타일링의 경우에만, 아무래도 여자친구의 의견을 따르는 편이죠.” 김지혜는 유준과 초등학교 동창이다. 벌써 몇 년째 연인이지만 학창 시절을 함께한 것은 아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만났을 때, 다른 시간 속에 살았는데도 같은 책과 영화를 보면서 비슷한 꿈을 갖고 있었어요. 신기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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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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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에 대한 유준의 기억엔 두개의 도시가 있다. 하나는 압구정동이 있는 서울이고 다른 하나는 런던이다. 처음 패션에 관심 두게 된 고등학생 시절, 압구정동은 신세계였다. 지금은 사라진 기억 속 편집매장들엔 나이키 농구화라든지 미국 캐주얼 브랜드가 넘쳐났다. 인터넷도 변변찮던 시절이었다. “<바운스> 같은 힙합 잡지를 모으고, ‘캠프’처럼 지금은 없어진 멀티숍에 다니면서 옷에 관심이 생겼어요.” 친구들은 모두 ‘힙합’ 음악에 빠진 다음 패션 세계로 편입되었지만, 그는 반대였다. 패션이 먼저였고, 그다음에야 음악이 귀에 들어왔다. 그 후 학교에 다니고 빈티지 시장에 드나들며 꿈을 찾았다.
단순한 헌 옷이 아닌 개개인의 시간과 추억을 담은 ‘빈티지’에 관심 갖게 된 것은, 2007년 런던행이 결정적이었다. ‘방법을 몰라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소년이 비로소 소녀에게 다가갈 방법을 깨닫는 경험’. 유준은 당시의 런던을 그렇게 기억한다. “막연하게 옷만 좋아하던 나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 곳이죠.” 런던은 20대 중반의 청년이 꿈을 잉태한 곳이었다. 그 꿈은, 몇 번의 직장 생활을 거쳐 이제 스스로 고른 옷을, 스스로 만든 스타일링과 콘셉트에 맞춰 보여주는 웹상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4년 전 청담동의 한 복합문화공간에서 바이어로 일할 때, 나는 이미 거리패션 사진 찍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유준은 손님으로 처음 만났다.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그는 여자친구와 함께 런던에서 공부하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학생이었다. 그들도 나도, 무언가 바뀌기 시작한 서울과 친구들의 움직임 속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지금 나는 사진을 찍고 칼럼을 쓴다. 그는 좋아하던 ‘빈티지’를 파고들었다. 2011년 봄의 그는 뉴욕 디자이너 톰 브라운과 리조트 룩을 좋아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상쾌하고 청량한 느낌이 드는 옷이 그의 취향이고,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드러난다. 단정하게 머리를 넘긴, 매력적인 이 청년의 웃음처럼 말이다.
그는 어떤 것을 걸쳤나? 재킷-워터플리즈 / 카디건-빈티지 / 셔츠·니트-무인양품 / 바지-유니클로 / 신발-뉴발란스 / 서류가방-포트 캔버스
글·사진 홍석우 패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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