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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모한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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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누들로드 이욱정 PD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
① “나만의 인생 레시피 만들자” 영국 요리학교 합격 한 방송사 피디가 있었다. 요리를 좋아했다. 2008년 세상의 맛을 향해 카메라를 들었다. 한 알의 밀이 국수가 되어 세계인의 식탁을 주유하는 여행을 따라나섰다. 2년간 10개 나라를 다녔다. 그가 제작한 프로그램은 <인사이트 아시아-누들로드>. 피디는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카메라 대신 칼과 도마를 잡았다. <누들로드>를 만든 이욱정 피디는 지난해 ‘르 코르동 블뢰’ 런던캠퍼스에 입학했다. 그의 처절하지만 달콤한 요리학교 생존기가 2주에 한번씩 펼쳐진다. 그의 유학생활을 담은 미니다큐는 ‘www.kbs.co.kr/cook’에서 볼 수 있다. 2년 전 어느 날, 한밤중에 홀로 <누들로드>편집실에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물이 막 끓기 시작한 2.5ℓ 냄비야, 우왕좌왕 망설이다 보면 펄펄 끓던 물은 어느새 증발해버릴 것이고 영원할 것 같던 불꽃도 사라져버리겠지, 죽이든 밥이든 걸쭉한 리소토든 더 늦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재료를 있는 대로 집어넣고 무언가 나만의 요리를 시작해야 돼.’ 품속에 오랫동안 숨겨둔 나만의 인생 레시피는 말 그대로 요리사가 돼보는 것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음식을 촬영하고 관련 자료를 공부했지만 정작 내 손으로 멋있게 만들 수 있는 요리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마치 야구전문 피디가 글러브 한번 만져보지 않은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들의 주방에 뛰어들어 내 두 손으로 주물러보고 잘라보고 익혀보고 싶었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바다 건너 요리학교에 무작정 지원서를 냈고(물론 아무도 모르게) 운 좋게도 합격했다. 정말 ‘말 그대로’ 나만의 요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무모했기 때문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프로듀서질 외에 다른 재주라곤 털끝만치도 없는 내가, 멋진 요리를 먹는 것은 섹스보다 황홀한 경험이라고 떠벌리면서도 막상 조리 경험이라고는 회사 야유회 요리 경력이 전부인 내가, 멀쩡히 잘 다니던 방송사에 휴직계를 던지고 전세금과 마이너스 통장까지 톡톡 털어 런던의 직업요리학교로 무작정 떠났으니 말이다. 이런 속 내용을 잘 아는 지인들은 나의 앞날을 적잖이 걱정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의심했다. “쟤가 무슨 믿는 구석(강남의 숨겨둔 부동산 같은 거 말이다)이 있겠지.” 하지만 실상 나의 믿는 구석은 설마 요리학교 다니면서 굶기야 하겠냐는 태평한 현실 판단과 무작정 저지르고 보자는 평소의 도전정신(투기심리라 불러도 좋다)뿐이었다. ‘나만의 요리’ 위해 전세금 털어 유학 떠나아무튼 정신을 차리니 세계 최고의 요리학교 ‘르 코르동 블뢰’(Le Cordon Bleu) 런던캠퍼스 앞이었다. 입학 첫날 아침 8시. 학교 문이 아직 열리기도 전, 런던 시내 한복판의 5층 건물 입구는 이미 신입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사 간 동네의 고등학교 입학식에 온 16살 소년이라도 된 기분이랄까! 뻘쭘하게 서 있는 다른 학생들도 모두 상기된 표정이 역력했다. 영국, 포르투갈, 헝가리, 타이, 말레이시아, 중국, 브라질 등. 국적도 어지럽게 다채롭지만 나이도 천차만별이었다. 고등학교 갓 졸업하고 온 애송이에서 그만한 큰애가 있어 보이는 아줌마까지. 그 틈에서 어색하게 서 있는데 머리카락을 박박 민 건달 인상의 한 녀석이 말을 걸어온다. “어디서 왔니? 난 브라질에서 온 호세야.” “난 한국에서 왔어, 이름은 복잡하니깐 그냥 리(Lee)라고 불러.”(내 이름 욱정을 제대로 발음하는 외국인은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말꼬를 트자 주변 친구들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기 시작한다. “난, 토미 슬라브. 크로아티아에서 장사하다가 왔다.” “난 안나야. 포르투갈에서 간호사로 일했어.” 내가 한국의 방송국에서 티브이 프로듀서로 일하다 왔다고 하자 다들 갑자기 관심을 보인다. “와~ 너도 요리 배우려고?” “나중에 나도 너의 쿠킹 프로그램에 출연시켜주라.” 요리학교 문턱에 발도 안 들여놓은 이들이 벌써부터 피디에게 로비를 하려 든다. 슬그머니 가방에서 비디오 카메라를 꺼내 촬영을 시작한다. 어쩔 수 없는 다큐피디의 직업 본능인가 보다. 잠시 후 정문이 ‘뿌우우~’ 하는 벨소리(1980년대 퀴즈프로그램 버저 소리와 아주 비슷하다)와 함께 열리고 학생들이 ‘야호~’ 환호성을 내지르면서 학교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드디어 입성이다! 부글부글 끓는 요리사의 신세계로 풍덩 몸을 던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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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정 피디(가운데)와 요리학교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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