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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1.27 15:03 수정 : 2011.04.28 11:16

누들로드 이욱정 PD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

[매거진 esc] 누들로드 이욱정 PD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
② 150분 동안 온갖 실수에 ‘키친패닉’ 상태

드디어 르 코르동 블뢰(Le Cordon Bleu)

초급과정의 실습시간이 시작됐다. 새로 지급받은 칼 가방의 지퍼가 빡빡한지 중간에 걸려 열리지 않는다. 칼도 못 꺼내고 혼자 낑낑대다가 옆의 여학생을 슬쩍 보니 벌써 셰프 나이프(프렌치 나이프로도 부르는 가장 기본적인 칼)를 꺼내 쓱쓱 갈고 있다. 이미 칼 다루기가 손에 익은 폼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학생은 이미 칼 갈기까지 마치고 그날 쓸 재료들을 능숙한 동작으로 다듬기 시작한다.

“지금 나, 초급반 교실에 와 있는 것이 맞아? 아니, 쟤들은 뭔데 왜 이렇게 잘하는 거지?” 사이좋게 같이 헤매면 내 마음이 한결 편하련만 초장부터 불안감이 몰려왔다. 실습이 시작한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주방 안에는 일종의 선두 그룹이 일찌감치 형성되어 있었고 나는 분명 그들 눈에는 안 보일 정도로 뒤처져 있었다. 실습 첫날 내가 처했던 긴박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선 르 코르동 블뢰 신입생들에 대한 배경설명이 잠깐 필요하다.

르 코르동 블뢰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대충 세 부류로 나뉜다. 그룹 A. 라이선스가 필요해서 들어온 경력자들이다. 학교 문을 두드리기 전에 이미 3~4년 동안 여기저기 레스토랑의 주방을 구르면서 탄탄한 실전경험을 쌓은 이들이다. 조리 실력이 뛰어난데도 비싼 등록금을 내고 요리학교를 들어온 이유는 명문학교 졸업장과 여기서 맺어진 인맥이 필요해서다.(좋은 레스토랑에 취업하는 데 연줄이 중요한 건 서양도 마찬가지다. 아는 셰프의 개인적인 추천 없이 이력서 수백 장 돌려봐야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건 요리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정설이다.)

그룹 A에 초급실습은 가볍게 몸풀기

헝가리에서 온 아틸라도 그런 경우다. 팔뚝에 호화찬란한 문신에 바짝 깎아 올린 헤어스타일 등 그는 인상부터 터프하다. 어떤 레스토랑의 주방에 가도 한명쯤은 마주칠 만한 전형적인 ‘쿡’이다. 피자 하우스의 견습생에서 시작해서 동네 작은 프랑스 레스토랑의 수셰프(Sous Chef·소규모 주방에서 주방장 바로 아래의 직급)까지 5년 이상 주방 밥을 먹었다. 그가 실습실에서 거침없이 재빠르게 요리하는 모습을 보면 선생인지 학생인지 분간이 안 간다. 르 코르동 블뢰 신입생 10명 중 3명은 이런 수준이다. 이런 친구들에게 초급과정의 실습 시간은 뭐 가볍게 몸을 푸는 정도, 아니면 신나는 장기자랑 시간이랄까.

그룹 B. 취미로 요리를 즐기다 셰프의 꿈을 키워 들어온 학생들이다. 흔히 학생들 사이에서는 커리어 체인저(career changer·전직희망자)라고 부르는데 다른 직업을 갖고 살다가 쿠킹의 묘미에 빠져 하던 일 접고 온 경우다.


신입생 중 절반 정도는 이런 경우인데 인도에서 온 튜사가 그랬다. 뭄바이의 잘나가는 컴퓨터 회사를 다니다 요리사가 너무 되고 싶어 다 때려치우고 있는 재산 다 털어 르 코르동 블뢰에 입성했다. 인도 영화배우 샤루크 칸을 닮았는데 못하는 인도요리가 없다. 그가 만든 탄두리 치킨은 황홀할 정도로 맛있다. 평생 모니터 앞에 앉아 있기에는 내가 봐도 아까운 재능이다.

이런 친구들은 비록 레스토랑 경력은 없지만 오랜 세월 홈 쿠킹으로 갈고닦은 실력이 만만치 않다. 집에서 혼자 느긋이 요리하던 습관이 있어 제한 시간 안에 여러 명이 어깨를 부딪히며 조리를 해야 하는 실습실 환경이 좀 낯설기는 하지만 이들 대부분의 실력은 세미프로의 수준이라 우왕좌왕하는 법이 없다.

마지막 그룹 C. 이 학생들 성향은 공통으로, 맛집 찾아다니는 것 즐기고 집에 가보면 책장에는 온갖 요리책이 가득하다. 또 몇가지 잘하는 ‘십팔번’ 메뉴가 있어 가족이나 친구들(물론 이들은 공짜손님이다)에게 “맛있다, 식당 한번 해봐라” 하는 칭찬도 몇번 들어본 적 있는 이들이다. (그런 인사치레 부추김을 진짜로 믿고 식당 차렸다 망한 사람 여럿 보았다.) 하지만 그룹 C의 실체는 양파 한 개도 제대로 썰 줄 모르는 완전 초보자들.(학생들이 즐겨 쓰는 표현으로 ‘주방의 얼간이들’(Kitchen Idiots)이다) ‘얼간이들’은 수적으로는 10% 안팎의 소수지만, 특유의 이상행동(예를 들면 잦은 비명 같은) 때문인지, 겁에 질린 낯빛 때문인지 프로와 세미프로들이 장악한 실습실에서 바로 눈에 띈다. 애처롭게도 이들은 주방에서 쉽게 패닉 상태(의학용어로 갑작스런 공포와 불안에 의한 심리적 혼란상태를 일컫는데 주방용어로는 굉장히 얼빠진 상태와 동일한 의미)에 빠진다.

이로 인해 때때로 지금 자신의 두 손이 무엇을 조리하고 있는지 뇌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A·B 그룹 멤버들의 동작을 필사적으로 엿보며 오직 대열에서 낙오하지 않으려는 처절한 생존 본능에 의존한 채 수업에 임한다. 스스로 참 인정하기 어려웠지만, 나는 마지막 그룹, 즉 얼간이 클럽의 멤버가 되었다.(이런 제길…)

더 심한 ‘얼간이’와 실수 덜 하기 선의의 경쟁

요리실습 중인 이욱정 피디.
암튼, 나는 주방 칼로 무장한 검투사들이 우글거리는 콜로세움 한가운데 패대기쳐졌고, 그 틈에서 150분 동안 살아남아 한 접시의 요리를 완성해야 했다. 이때부터 나는 인간이 주방에서 저지를 수 있는 매우 다채로운 실수와 사고를 골고루 체험하게 된다. 그 와중에 나에게 심적 위안이 되어준 친구가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디토였다. 그가 초급과정 내내 나의 심리적 안전망 구실을 해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가지. 나보다 더 심한 얼간이 짓으로 자칫 나에게만 쏟아질 수 있는 선생님의 시선을 적당히 분산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실습 첫날, 내가 칼 가방의 지퍼를 겨우 열었던 순간에도, 디토는 여전히 가방을 붙잡고 씨름하고 있었다. 그것도 주방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말이다.(키친 패닉의 전형적인 사례다.) 이 광경을 본 프랑스 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기는 자카르타 시장이 아니야. 빨리 일어나요.”

그날을 시작으로 우리 두 사람은 주방 실수 챔피언 자리를 놓고 선의의 경쟁을 벌이게 됐는데 디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대형사고를 저질러 번번이 나를 압도했다. 한마디로 내가 ‘걸어다니는 주방실수 포켓사전’ 정도였다면 디토는 ‘옥스퍼드 대백과’였다.

글 KBS 피디(www.kbs.co.kr/cook)·사진 제공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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