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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4.14 11:20 수정 : 2011.04.14 16:09

다국적 식객부대, 한식의 처녀림 탐험하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윤재

[매거진 esc] 누들로드 이욱정 PD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
⑦ 다국적 식객부대, 한식의 처녀림 탐험하다

‘르 코르동 블뢰’는 세계 11개국에 14개 캠퍼스가 있다. 그중에서 런던 캠퍼스는 가장 다양한 나라의 학생들이 모인 학교다. 요리과정은 한 기수가 50명 정도 되는데 국적을 따져보면 15개 나라가 넘는다. 아무래도 영국이다 보니 유럽 학생들이 절반쯤 되고, 아메리카와 아시아 학생들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확실히 나라별로 개성들이 강하다. 예를 들어 남미나 포르투갈, 스페인 같은 라틴 문화권에서 온 친구들은 떠들썩하고 화끈하다. 요리하는 스타일도 거침없고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수업 시간에 옆자리에 앉게 되면 좀 시끄럽다는 점 빼고는 함께 어울리면 항상 기분이 유쾌해져서 좋다. 서유럽 출신들은 자기주장과 요구가 분명하고 논리적이다. 시연 수업 중 셰프가 교과서의 레시피와 조금이라도 다르게 요리를 하면 대충 넘어가지 않고 바로 따져 묻는다. 깍쟁이들이 많은 편이다. 아시아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조용하고, 모르는 것이 있어도 손들고 질문하는 법이 없다. 교실 맨 앞자리에 앉는 공붓벌레들이 많다. 손놀림이 서양인들에 비해 날렵해서인지 요리 테크닉이 상대적으로 뛰어나고 섬세하다. 담배 인심도 좋고 노트도 잘 빌려준다.

배우는 것이 프랑스 요리이므로 동양보다는 서양 학생들이 유리한 경우가 많다. 치즈, 소시지, 버터, 크림을 어릴 적부터 끼니마다 먹고 자란 서양 학생들은 프랑스 요리의 적지 않은 식재료와 레시피를 이미 입학 전에 눈과 입으로 예습한 상태다. 그러니 당연히 간장, 된장 먹고 자란 아시아 학생들보다 모든 면에서 이해가 빠르다. 이를테면 시연 수업 때 ‘초리소(쇼리수) 소시지’가 식재료로 나오면 나는 퍼뜩 감이 안 온다. 생소한 모양새의 이 훈제 고깃덩어리의 제대로 된 맛이 어떤 것인지, 또 무슨 요리에 어떻게 쓰이는지 아리송하다. 반면 옆의 포르투갈 페드루는 어릴 적 할머니가 집에서 초리소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 맛이 얼마나 끝내줬는지 두 시간은 늘어놓을 수 있다. 페드루에게 초리소는 홈메이드 순대이자 메주다. 이렇게 문화적 차이는 있어도 먹는 것에 목숨을 건다는 점에서는 우리는 전부 한통속이다. 음식 이야기만 나오면 수다가 끝이 없다. 다른 나라 음식에 대해서도 호기심이 가득 차 있다. 틈만 나면 에스닉 스타일의 레스토랑에 우르르 떼지어 몰려가 미지의 메뉴를 맛보는 모험을 즐긴다.

문화 달라도 음식에 목숨걸기는 공통점

하루는 날을 잡아 런던 시내 한식집으로 동급생들 한 무더기를 불렀다. 원래는 학교 끝나고 딱 5명만 가기로 한 것이 그날따라 다들 약속이 없었는지 눈덩어리처럼 지원자가 늘어나더니 순식간에 식객은 12명이 되었다. 그날 모인 면면들을 보면 브라질, 포르투갈, 베네수엘라, 영국, 노르웨이, 그리스, 중국, 말레이시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이스라엘, 미국까지 그야말로 유엔 총회를 방불케 하는 구성이었다.

그날 놀란 사실 하나. 12명의 다국적 평가단 중 말레이시아와 중국 친구 두 사람을 빼고는 태어나서 한국 음식을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이럴 수가! 국내 언론과 우리 정부의 한식 세계화 팡파르 소식이 사실이라면 이미 전세계인이 한식의 매력에 폭 빠져 있어야 마땅할진대 말이다. 다른 나라 식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한 국제적 요리학교 학생들에게조차 한식이 아직 생소하다니!(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우선 그 숫자가 절대적으로 적다. 전세계 온갖 국적의 레스토랑이 모여 있는 런던에서조차 틀을 제대로 갖춘 한국 음식점은 요리의 질을 떠나 수적으로 10곳이 채 안 된다.)

런던에 있는 한식당을 찾은 이욱정 피디와 친구들.

한식이라는 처녀림에 첫발을 들여놓는 다국적 평가단의 반응이 내심 궁금했다. 이것저것 여러 접시를 주문해서 조금씩 맛보게 하고 그때그때 음식이 어땠는지 묻기로 했다. 멤버들 전부 요리에 대해 한 소견 하는 ‘준셰프’들이라 적당히 맛있다 칭찬할 리 없었다. 한식이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 내가 조리해서 서빙하는 것도 아닌데 서바이벌 키친 프로그램 출연자라도 된 듯이 긴장이 되었다.

식사가 나오기 전에 반찬이 나왔다. 반찬은 나중에 밥과 함께 먹는 것이라고 설명을 해주었지만 젓가락이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서양식 식사법에 따르면 스타터(전채요리)에 해당하는 순서라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다. 시원한 무채나 간이 세지 않은 나물은 샐러드처럼 먹기 좋다는 평이 나왔다. 하지만 맵고 짭짤한 밥반찬이 식사의 맨 처음 나오는 것은 쉽게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이었다. 불고기, 잡채, 만두는 역시 예상대로 반응이 좋았다. 양념한 고기를 그릴에 굽거나 고기와 채소를 볶는 방법은 서양 식객들에게도 이미 익숙한 레시피라 한식이 초면인 손님들에게도 금방 친해질 수 있는 듯했다.

12명 중 10명 “한국음식 한 번도 못 먹어봐”

이어서 난도가 높은 메뉴를 주문해봤다. 물냉면과 비빔냉면. 반응이 극단으로 갈렸다. 냉면 선호그룹은 물냉면의 씹는 맛이 재미나고 새큼한 육수가 입맛을 돋우는 효과가 있다고 높은 점수를 주었다. 하지만 애피타이저로서는 양이 너무 많다는 지적이 나왔다. 비빔냉면은 의외로 인기를 못 얻었다. 비빔소스의 눈물 나게 매운 맛이 미각을 마비시키는 통에 다른 어떤 맛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냉면에 반대표를 던진 멤버들도 의견이 분분했다. 면발이 고무줄을 씹는 것 같고 물냉면의 얼음같이 찬 육수는 참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평이 나왔다. 빵과 채소로 만든 스페인의 차가운 수프인 가스파초가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의 외국인들에게 데우지 않은 고기수프를 국수와 함께 먹는다는 것은 상상이 안 가는 듯했다. 누들로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인터뷰했던 일본 전문가의 말이 기억났다. “냉면과 같은 국수는 한국 이외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가장 독창적인 한국의 국수다.” 식탁의 세계에서 유니크함은 종종 높은 진입장벽을 의미한다. 혀처럼 보수적인 신체기관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육개장을 주문했다. 밥을 시켜 같이 먹게 했다. 헝가리 친구 아틸라는 땀을 뻘뻘 흘리며 한 그릇을 다 비웠다. 헝가리의 얼큰한 수프 굴라시(헝가리어로는 구야시)보다 낫다고 최고의 평가를 내렸다. 수프 안에 든 정체불명의 말린 채소(고사리), 쌀밥을 수프에 말아먹기, 수프를 메인 요리로 서빙하는 것 등이 좀 어색했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음습한 영국 겨울날씨에 그만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초대받지 않은 식객 덕분에 나는 그날 지갑을 톡톡 털어야 했다. 하지만 미래의 스타 셰프들에게 한식이라는 미지의 신세계를 보여주었다는 사실에 뿌듯한 마음으로 식당 문을 나왔다. 한식의 세계화란 일방적인 전파가 아닌 함께 배우고 공유하는 소통이 아닐까. 친구의 레시피를 배우고 나의 레시피를 나누는 것처럼.

글 이욱정 KBS PD(kbs.co.kr/cook)·사진 제공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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