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5.12 10:43
수정 : 2011.05.12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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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 실기시험과 벌인 필사의 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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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누들로드 이욱정 PD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
9. 2인의 낙제 유력후보 피말리는 경쟁…그리고 반전
입학 3개월 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초급과정의 최종 관문이자 당락을 결정짓는 ‘파이널 프랙티컬 테스트’, 기말 실기시험이었다. 평소 수업시간의 평가가 아무리 좋아도 소용없다. 이 마지막 실기시험을 망치면 낙제 처리되어 초급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들어야 한다.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리고 등골이 오싹했다. 그 비싼 등록금을 다시 내야 한다는 것도 끔찍했지만 새파란 신입생 반으로 돌아가 지긋지긋한 신병훈련을 또다시 받는다는 것은 치욕 중 치욕이었기 때문이다.
초급과정 낙제를 하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악몽이 따로 없었다. 등록금 추가 대출도 걱정이었지만 창피해서 얼굴 들고 한국에 못 돌아갈 것 같았다. “거 봐라, 방송국 피디가 겁없이 르 코르동 블뢰 들어오더니만, 결국 레벨 원도 못 통과하고 낙방이네.” 낙제를 하느니 250도 식용유에 가운뎃손가락을 ‘딥 프라이’(Deep-Fry)하는 편을 택하고 싶을 정도였다.
기말시험은 3주나 남았지만 초급반 교실은 비장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여느 때 같으면 뒷자리에서 꾸벅이고 있거나 옆자리 노르웨이 금발녀의 뒤태나 감상하고 있었을 ‘얼간이 그룹’ 멤버들까지도 눈에 불을 켜고 수업에 집중할 정도였다.
불안한 아이들 사이에 출처 미상의 괴담이 돌기 시작했다. “지난 기수들의 기말시험 때 지하철 센트럴 라인(우리로 치면 1호선쯤 된다고 보면 됨)이 신호기 고장으로 갑자기 서버리는 바람에 5명이 무더기로 지각해 시험을 못 봤다.” 거의 골동품 수준의 런던 지하철은 툭하면 고장이라 상당히 신빙성 있게 들렸다. “2층 주방의 왼쪽 마지막 작업대 오븐 온도조절기가 제멋대로라 지난 시험 때 그 오븐을 사용했던 학생 2명이 모두 양갈비를 새까맣게 태워먹어 떨어졌다.” 이것 역시 충분히 발생 가능한 시나리오로 들렸다. “맨해튼의 원 스타 레스토랑에서 일하다 온 똘똘한 미국 친구가 그 전날 먹은 생선이 탈이 나서 시험 날 주방에서 정신 못 차리고 헤매다가 탈락했다더라.” 이런 기말시험 괴담은 눈덩어리처럼 불어나고 모두를 떨게 만들었다.
낙제하느니 차라리 손가락을 튀기리
상위권 친구들도 긴장을 놓지 못하는 판이니 하위그룹 멤버들은 시험 날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반패닉 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우리 반에서는 두 사람이 낙제 괴담 시즌 2 주인공 후보로 유력했다. 첫째 후보는 인도네시아에서 온 ‘걸어다니는 주방실수 대백과’ 디토였다. 디토에게는 도저히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재주가 있었다. 이를테면, 남부 프랑스 레시피를 가지고 자카르타 가정식을 만들거나 전채와 메인요리 레시피를 뒤죽박죽 믹스해서 셰프의 혼을 빼놓는 것이 주특기였다. 특히 그의 뿔닭(Guinea Fowl) 구이요리는 하도 처참해 보여서 한적한 시골 국도에서 대형 화물트럭에 치여 죽은 야생 고양이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이런 디토의 뒤를 바짝 뒤쫓는 또 한 사람의 유력한 낙제 후보는 슬프지만 바로 나였다. 물론 나는 항상 속으로, 그래도 디토보다는 내가 여러 면에서 앞서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조리수업 때도 디토에게만은 슬쩍 으스대기까지 하면서, 내가 이것저것 ‘코치’해주곤 했다. 하긴 모의실기 테스트 때도 나는 턱걸이이긴 했지만 제한 시간 안에 한 접시를 완성할 수 있었던 반면, 디토는 수업종이 칠 때까지 야생동물 사냥에 열중하고 있었으니까.
대망의 기말시험 메뉴가 발표되었다. 프로방스 햄과 버섯으로 속을 채운 뿔닭 요리와 화이트 와인으로 조리한 가자미(Lemon Sole)! 두 가지 메뉴 중 하나를 시험 당일 제비뽑기로 선택하고, 정확히 3시간 안에 오이와 감자로 만든 사이드 요리 한 접시씩을 곁들여 완성해야 한다. 제비뽑기에서 어떤 것이 걸릴지 모르니 두 가지 메인과 두 가지 사이드 요리 전부를 숙달해야 한다. 사실 두 가지 메뉴 전부 프랑스 요리의 가장 기본이자 바탕이 되는 테크닉과 방법을 포함하고 있어 시간 안에 제대로 완성하는 것이 녹록지 않다.
르 코르동 블뢰 셰프들은 반복학습을 통한 근육과 혀의 기억이 결국 쿠킹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요지는 과정을 패스하고 싶으면 집에 돌아가서 항상 복습을 열심히 하라는 것이다. 일반적인 시험공부야 조용한 방에 책 펴놓고 읽기만 하면 되지만 요리학교의 실기시험 준비는 나름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하다. 한 마리만 가지고 달랑 한 번씩만 연습할 수밖에 없으니 큰 슈퍼마켓에 가서 레시피에 나오는 재료들을 산더미같이 사와야 한다.
뿔닭 같은 것은 일반 슈퍼마켓에서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중간 크기의 닭으로 대신하고 가자미도 처음 다듬기 연습이 중요한지라 내장이며 지느러미며 온전한 것으로 서너 마리를 준비했다. 집에 돌아가, 밤늦게까지 주방에 박혀 닭을 토막 내고 생선살을 발랐다. 뿔닭요리는 닭을 빠른 시간 안에 다듬는 작업과 감자무스를 보기 좋게 하는 일이 어려웠다.
‘디토한테만 안 뒤지리라’ 다짐 또 다짐
어렵기는 가자미가 더했다. 특히 껍질과 가시를 제거하고 흰살 부분만 널찍하게 펴고 부서지지 않게 속을 채워서 김밥처럼 마는 부분은 상당히 고난도의 테크닉이 필요했다. 그래서 생선보다는 뿔닭요리가 제비뽑기에서 걸리기만을 기도했다. 며칠 동안 집에서 똑같은 요리만 먹어야 했지만, 암튼 적어도 디토에게만은 뒤져서는 안 된다는 필사의 각오로 버텼다.
결전의 날이 왔다. 다행히 그날 아침 배탈도 나지 않고 지하철 신호기도 정상 작동한 덕에 시험 30분 전 학교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실습 주방 앞에는 시험 시작을 기다리는 학생들로 벌써부터 북적대고 있었다. 디토는 흰 유니폼과 앞치마를 깨끗이 다려 입고 최후의 결전을 앞둔 특공대원처럼 한껏 엄숙한 표정을 지은 채 뿔닭 레시피를 외고 있었다. 그의 몸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보였다. 나의 라이벌은 떨고 있음이 분명했다. 잠시 후 운명의 제비뽑기! 나는 바라던 대로 뿔닭요리를 뽑았고 라이벌은 가자미를 뽑았다. 일단 대진표는 나에게 유리했다.
그리고 내 생애에 가장 빨리 흘러간 세 시간! 요리 제출 15분 전, 우연히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디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공황상태에 빠진 것이 분명했다. 어렴풋하게 보였지만 그의 가자미도 위기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디토가 우리 반 우등생 A에게 절박한 손짓으로 에스오에스(SOS) 구조신호를 보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남 일에 신경 쓰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여하튼 그렇게 전투는 끝났다.
다음날 시험 결과를 담임 셰프에게 듣기 위해 학교에 나왔다. 복도 끝에서 중국 여학생이 울고 있었다. 요리를 너무 늦게 제출하는 바람에 감점을 당했고 결국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던 것이다. 불길했다. 셰프가 내 성적표를 찾아 내밀었다. “Congratulation! You passed the exam!”(축하해, 합격이야) 디토를 포함해 우리 반 모두 합격이었다. 이번에는 괴담 대신에 출처 미상의 뒷담화가 떠돌기 시작했다. 디토의 가자미 요리 모양새가 A의 것과 참 많이 흡사했다는… 하하하!
이욱정 KBS PD(www.kbs.co.kr/c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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