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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좋아…슈거파탈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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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누들로드 이욱정 PD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
13. 설탕 덩어리래도 달콤한 불량함이 우리를 살게 하는 건 아닐까 르 코르동 블뢰의 파티스리(제과제빵과) 실습실에는 대형 쌀통만한 플라스틱 상자가 3개 놓여 있다. 상자 하나에는 ‘T.55’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빵을 만들 때 주로 쓰는 강력분 밀가루다. 두 번째 상자에는 ‘T.45’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케이크나 과자 만들 때 쓰는 박력분이다. 그리고 마지막 상자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거나 ‘S’라고 쓰여 있다. 처음 교실에 들어가 호기심에 뚜껑을 열어보았다. 초대형 통에 한가득 담겨 있던 것은 엄청난 양의 하얀 설탕가루였다. 내 생전 그렇게 많은 양의 설탕을 본 적이 없었다. 생뚱맞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영화 <천국의 나날들>의 메뚜기 습격 장면이 떠올랐다. 여주인공 린다가 주방에서 일하다가 창문 안으로 날아 들어온 메뚜기 한 마리를 발견한다. (요놈! 귀엽네!) 그런데 한 마리가 아니었다. 다음 컷은 광활한 벌판을 새까맣게 뒤덮은 메뚜기 떼의 공습! (악! 이건 뭐야~) 커피숍의 손가락만한 종이팩에 담긴 설탕만 보다가 갑자기 산같이 쌓인 흰색의 가루를 마주하자 그 물량에 왠지 모르게 압도당한 기분이었다. 상자 안에는 쌀집에서 곡물 퍼담을 때 쓰는 것 같은, 손잡이 달린 큼지막한 용기가 놓여 있었다. 심상치 않았다. 아니, 왜 이렇게 교실에 어마어마한 양의 설탕이 비치되어 있는 걸까? 실기 수업이 시작되자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했다. 프랑스 디저트에는 악! 소리 날 만큼 많은 분량의 설탕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냥 들어가는 정도가 아니라 들이붓는다고 생각하는 편이 정확할 정도였다. 큰 계량컵 한가득 설탕을 퍼 와도 시럽 졸이고 스펀지케이크 굽고 크림 만들고 나면 순식간에 다 사라져버린다. 실습교실 학생들이 전부 데커레이션(장식)이라도 만들라치면 큰 통에 가득 차 있던 설탕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바닥을 보인다. 예를 들어, 가토 데 되 피에르(Gateau des Deux Pierre·라즈베리가 들어간 대표적인 프랑스 초콜릿 케이크)에는 초콜릿 자체에 포함된 설탕을 빼고도 225g의 백설탕이 들어간다. 생맥주잔 절반 정도다. 그 정도는 단것 축에도 못 든다. 다크 초콜릿 퍼지케이크에는 500g, 버터크림이 든 롤케이크에는 680g이 들어간다. 작고 예쁜 마카롱도 알고 보면 설탕 덩어리이다. 달걀흰자 60g과 그 갑절 분량의 설탕이 들어간다. 메뚜기떼 연상케 하는 설탕의 대공습 파티스리 초급반 학생들이야, 나를 포함해서, 열이면 열 모두 단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디저트 애호가들이다. 방송국 내 책상 서랍에는 항상 달콤한 과자와 초콜릿이 쟁여져 있을 정도였으니깐. 그리고 맛있는 디저트일수록 설탕이 많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버터크림을 만들기 위해 설탕을 한 바가지씩 집어넣을 때 모두 한마디씩 안 할 수 없었다. “대체, 이 크림 한 덩어리 안에 어떻게 이 많은 설탕이 녹아 들어갈 수 있는 거지?” “이 장면은 손님들에게 절대 보여주면 안 될 거야. 왜냐면, 소시지를 맛있게 먹으려거든 소시지 만드는 장면을 보면 안 되거든.” “와우, 보기만 해도 혈당이 오르는 기분이야.” 암튼, 주방에서 설탕의 비밀을 목격하고 나니 괜히 꺼림칙해졌다. 집에 돌아와 구글 검색창에 설탕이라고 써보았다. 설탕의 해악이라는 검색어가 자동으로 꼬리를 달고 바로 나왔다. “설탕은 충치·비만·당뇨의 주범.” “칼슘 결핍과 심장병의 주원인.” 이 정도는 약과였다. “설탕 과잉섭취 청소년 폭력 유발.” “백색의 마약, 죽음의 백색 가루.” 심지어는 “백색의 살인마”까지 무시무시한 표현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한 외신기사에는 일본의 한 청소년이 끔찍한 연쇄살인을 저질렀는데 그 주원인이 설탕 과잉섭취 때문이었다는 분석까지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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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를 만드는 이욱정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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