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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붙은 파리’에 열광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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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들로드 이욱정 PD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
14. 학교와 요리사 설득해 다큐멘터리 촬영 나서
르 코르동 블뢰로 요리유학을 가야겠다고 작정했을 때 머릿속에 한 편의 다큐멘터리 기획안이 떠올랐다. 세계 곳곳에서 최고의 셰프를 꿈꾸며 모여든 젊은이들. 그들이 요리사의 세계로 첫발을 내딛는 과정을 피디가 직접 체험하면서 생생하게 기록한다. 국제적 명성의 요리학교 학생들의 입학에서 졸업까지의 전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본다는 기획은 피디로서 도전할 만한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막상 실천에 옮기려 하자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내가 조리수업을 받으면서 동시에 카메라를 들고 직접 촬영까지 해볼까도 생각했다. 오른손에는 카메라, 왼손에는 칼을 들어보겠다는 심산이었는데 참으로 요리학교의 실상을 몰라도 한참 몰랐던 것이었다.(꿈도 야무지지, 양손으로 칼을 잡아도 모자랄 판에 촬영까지 하겠다고?) 다행히 영국 런던 현지에서 촬영과 연출을 도와줄 좋은 인재들을 구할 수 있어서 그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이 되었다.
한손엔 칼, 한손엔 카메라? 꿈도 야무지지…
진짜 난관은 르 코르동 블뢰 런던캠퍼스 쪽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르 코르동 블뢰 재단은 제작을 한껏 도우려는 입장이었지만 촬영의 주무대인 런던캠퍼스는 촬영을 앞두고 걱정이 많았다. 학교가 첫째로 우려한 것은 주방 촬영 도중 발생할 수 있는 안전사고였다. 주방이라는 곳이 워낙 ‘뜨거운 것들’과 ‘날카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라 순간 방심하다가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다는 염려였다. 학교 쪽에서는 사고 방지를 위해 카메라맨이 주방에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만 촬영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요리사가 신선도 높은 최고의 식재료를 원하는 것처럼 피디와 카메라맨은 한 발이라도 더 가까운 위치에서 좋은 영상을 잡아내고 싶은 법. 그런 원초적인 직업본능을 포기하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찍으라고 하니 갑갑했다. 그래서 절충하여, 입구에서만 찍되 카메라 위치를 꼭 바꿀 때는 셰프의 허락을 받기로 했다. 두번째 장애물은 이렇게 잘 넘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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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들은 밝은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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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프건 학생이건 카메라에 눈 맞추기 바빠 드디어 르 코르동 블뢰에서의 촬영이 시작됐다.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벽에 붙은 파리’(fly on the wall·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방식으로 카메라는 학교의 일상적인 장면들을 찍기 시작했다. 때로는 시연 교실에서, 또는 주방 한구석, 방과후 근처 펍에서 모여 한잔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가감 없이 담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혹시라도 학생들이 카메라의 존재를 불편해할까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이건 웬걸, 그런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 아시아에서 온 학생들은 카메라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긴 했다. 그러나 유럽이나 남미 학생들은 달랐다. 학교에 카메라가 오는 날이면 아주 제대로 신이 났다. 평소 같으면 수업시간에 교실 맨 뒤편 자리에 앉아 몰래 문자 보내기에 바빴던 녀석들까지 촬영이 있는 날은 셰프에게 왜 그리 질문을 많이 해대는지. 카메라가 남자 탈의실에라도 들어가면 옷 입다 말고 즉석에서 막춤 국제 대결이 벌어졌다. 몇 주 지나자 학교에서 한국 다큐 제작팀은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기 시작했다. 덩달아 나도 주목을 받게 됐는데 그것이 나에게는 문제였다. 우선 촬영이 있는 날은 셰프들이 유난히 내 옆에 자주 와서 밀착지도를 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다른 때 같으면 양파 썰다가 껍질이 한 조각 들어갈 수도 있고 시간에 쫓기면 소스를 제대로 졸이지 못하고 끝낼 수도 있으련만 바로 곁에서 셰프가 열심히 지켜보고 있으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그리고 촬영하는 날은 수업시간에 마음 놓고 졸 수도 없었다. 그놈의 카메라가 자꾸 나를 향하고 있으니 말이다.(분명히 몇 번은 제대로 찍혔을 것이 분명하다.) 또 실습하다 막혀 옆자리의 우등생 아브라함의 접시를 슬쩍 엿보려고 하면 어느새 카메라가 얼빠진 내 얼굴로 줌~인 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촬영으로 누린 혜택이 더 많았다. 파티 초대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덕분에 다채로운 나라의 요리들을 맛볼 수 있었다. 첫날 태클을 걸어왔던 아틸라는 매콤한 헝가리식 파프리카치킨을, 호세는 팥과 고기 맛이 잘 어우러진 브라질의 국민요리 페이조아다를, 영국 옥스퍼드에서 온 샘은 돼지껍데기가 입에서 살살 녹아내리는 포크벨리를 선보였다. 이들의 쿠킹 동영상을 제작하여 르 코르동 블뢰 동기들의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그 반응이 한마디로 열광적이었다. 그런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레시피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나눌 수 있었다. 요리는 최종 완성품만큼이나 과정 자체가 시각적으로 참 아름답다. 자연 상태의 식재료들이 요리사의 손을 거치면서 한 그릇의 승화된 작품으로 변신하는 과정은 때때로 경이롭기까지 하다. 요리학교에 간 카메라는 우리 모두에게 그 눈을 뜨게 해주었다. 글 이욱정 KBS PD(www.kbs.co.kr/cook)·사진 제공 최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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