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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8.18 11:32 수정 : 2011.08.18 11:32

[매거진 esc] 누들로드 이욱정 PD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

15. 프랑스가 요리 세계 강자로 떠오른 비결은…

프랑스 요리학교 르 코르동 블뢰 학생들의 국적은 참 다채로운데 아무래도 유럽 학생들이 절반을 차지한다. 유럽 학생들의 나라 구성에서 한가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이탈리아인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땅덩이로 보나 인구 규모로 보나 최소한 한두 명은 끼어 있어야 정상인데 50명의 동기생 중 이탈리아인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핀란드, 포르투갈, 벨기에, 독일뿐 아니라 멀리 크로아티아 학생들까지 우글거리는 판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까?

그런 의문을 품고 있던 차에, 우연히 상급과정 선배 중 이탈리아 여학생이 한 명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에서 온 티치아나는 30대 후반, 런던과 피렌체를 오가며 올리브유 사업을 하다 프랑스 요리를 배우러 왔다. 학교 앞 샌드위치 집에서 점심을 먹다가 슬쩍 물었다. “티치아나, 왜 르 코르동 블뢰에 이탈리아 학생이 이렇게 없는 거야?” 그 질문에 티치아나가 열심히 먹던 모차렐라 파니니를 접시에 내려놓더니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빨간 안경테를 뾰족한 콧날 위로 고쳐 올리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의 프랑스 요리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역사를 아니? 피렌체 공주가 프랑스로 시집가면서 전해준 거야. 그 전까지는 프랑스 귀족들은 포크도 쓸 줄 몰라 더러운 손으로 음식 집어 먹던 야만인들이었어.”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가의 카테리나 공주가 앙리 2세와 결혼하면서 데리고 간 피렌체 요리사들을 통해서 오늘날 프랑스 요리가 시작됐다는 이야기는 티치아나에게 처음 듣지 않았다. 서울에 있을 때 잘 알고 지내던 이탈리아인 셰프도 내가 프랑스 요리학교로 유학 가게 됐다고 하자 대뜸 해준 조언이 두가지였다. “이탈리아 요리는 올리브유를 주로 사용하죠. 그래서 맛도 맛이지만 건강에 좋아요. 하지만 프랑스 요리는 달라요. 버터와 크림을 너무 많이 넣어서 매일 먹다가는 간이 푸아그라처럼 탱탱하게 붓게 되지요.” 그것이 그의 첫번째 조언이었고 또 하나가 티치아나의 피렌체 공주 스토리였다.

피렌체 공주 아니었다면 야만인 못 벗어났을걸

티치아나의 식문화사 강의는 어느덧 중세를 지나 로마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와인이며 치즈며 프랑스 애들이 자기들 것이 세계 최고라고 뻐기잖아. 하지만 알고 보면 와인과 치즈를 전해준 것도 로마제국이었어. 그때 프랑스 애들은 짐승털 옷 걸쳐 입고 멧돼지 사냥이나 하면서 살던 미개인들이었지.” 갑자기 얼마 전 일본 식기를 극찬하는 영국 친구에게 내가 쏘아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일본 자기, 실은 다 우리가 전해 준 거야.” 말해놓고 나서 왠지 모르게 허무했던 기억이 있다. 티치아나도 그 비슷한 기분이었는지 안타까운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와인, 요리 할 것 없이 프랑스 것이 우리를 제치고 최고급이 돼버렸어. 이탈리아 음식이라고 하면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파스타, 피자만 떠올리는데 말이지. 그 이유가 뭔지 알아. 다 마케팅 때문이야. 마케팅! 프랑스 애들은 그걸 잘했거든.” 티치아나가 마케팅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약간 경멸적인 뉘앙스가 느껴졌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사람들은 좋은 와인은 밖으로 내다 팔 생각을 안 해. 맛있는 건 우리가 일단 다 마시고 맛없는 것만 영국에든 일본에든 줘버리는 거지. 그런데 프랑스는 반대야. 맛없는 건 자기들이 마시고 좋은 와인은 테루아르니 그랑크뤼니 그럴싸하게 허풍을 섞어서 비싼 값에 팔아버리는 거야. 타고난 장사꾼들이지.”

정성스럽게 빵을 만들고 있는 이욱정 피디.
티치아나의 역사학 강의가 경영학 강의로 막 넘어가려는 찰나 한번 더 물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내 질문의 답을 듣고 싶은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대체 왜 르 코르동 블뢰에 이탈리아 학생이 없는 거야?” “당연한 거지, 이탈리아 요리가 세계 최고인데 뭐 때문에 프랑스 요리를 배우러 오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티치아나의 르 코르동 블뢰 유니폼이 아주 잠시 어색해 보였다. 그녀도 그런 나를 눈치챘는지 부연설명이 곧 뒤따랐다. 그런데 앞에서와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한풀 꺾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조금 달라. 이탈리아 요리가 최고이기는 하지만 프랑스 애들한테 배울 점이 있긴 해. 테크닉이나 프레젠테이션(완성된 요리를 보기 좋게 접시에 담는 방법) 같은 것 말이야.” 시간도 없었고 더 묻는 것은 피차 곤란할 듯해서 수다는 그쯤 끝났다.

이탈리아 식탁 훌륭하지만 서양요리 기본은 프랑스식

<누들 로드> 촬영 때문에 이탈리아 북부에서 남부까지 두루 돌아다니며 각 지방의 음식을 먹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 덕분에 이 위대한 나라가 지닌 식문화의 깊이와 폭이 피자와 파스타를 훨씬 넘어선다는 것도 알게 됐다.

심플하면서 재료의 신선함을 최대한 살리는 조리법, 한 나라의 음식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다양한 지역적 특성, 온 국민의 음식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열정, 이탈리아의 식탁은 프랑스 못지않은 때로는 그것을 능가하는 장점들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미식 세계의 헤게모니는 프랑스 편에 있는 듯 보인다. 국제적인 요리학교 절대다수는 프랑스 요리를 근간으로 가르치고 있고 뉴욕, 런던, 도쿄 할 것 없이 최고급 호텔 레스토랑 역시 대부분 프랑스 음식점이다. 이탈리아 음식점이 아시아, 아프리카 할 것 없이 골목골목 성황을 이루어 저변 확대에 성공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서양요리의 기본은 ‘프랑스 식’이라고 보는 것이 이쪽 분야에서 통용되는 상식이다. 일류 프랑스 요리학교를 졸업하고 미슐랭의 별들이 번쩍이는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수련을 쌓아야 주방 세계의 진정한 엘리트 대접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보면 프랑스야말로 가장 일찍이, 또 가장 성공적으로 자국 음식의 세계화를 성취한 나라인 셈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나는 이런 질문의 답을 학교 안에서 찾을 수 있었다.(16회에 계속)

글 KBS PD(www.kbs.co.kr/c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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