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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9.15 11:03 수정 : 2011.09.15 11:03

오븐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

[매거진 esc] 누들로드 이욱정 PD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

17. 클래식카 수집가든 밤샘 알바 고학생이든 요리실력만 있으면 최고!

돈이 딱 떨어졌다. 내 핸드폰에는 은행 잔고가 100파운드(약 18만원) 이하로 내려가면 문자로 경고가 온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마트로 장을 보러 나왔는데 부르르 경고 문자가 찍혔다. 전기, 가스, 물 사용료와 인터넷, 핸드폰 비용까지 한꺼번에 자동으로 빠져나가버리니 간당간당하던 은행 잔고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무엇보다 집세가 큰일이었다. 런던의 집세는 상상을 초월할 수준. 낡고 좁은 방 2개짜리 집도 월세로 150만원이 훌쩍 넘는다. 아직 월세를 낼 날이 일주일 정도는 남았지만 그사이에 돈을 마련해야 한다는 걱정에 가슴이 갑갑해졌다.

깐깐한 영국 집주인 피터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기도 방송계에서 일했다고 처음에 집을 얻을 때는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었다. 사는 집도 가까워서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전화하라고 했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보통 까다로운 주인이 아니었다. 툭하면 문자를 날리는데 “욱정, 너 재활용 쓰레기통이 넘치더라, 이웃들이 싫어하니 빨리 처리해라”, “밤 10시 이후에는 쿵쿵거리지 마라, 아랫집에서 싫어한다” 등. 작은 일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집세 내기 하루 전에는 ‘친절하게도’ 잊지 말라는 문자까지 보낸다. 집세를 제때 못 낸다면 이건 정말 낭패였다.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져 마트 진열장의 8파운드짜리 와인 한 병을 집으려다 바로 포기한다. 계산대에서 카드를 긁는데 혹시라도 안 될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 몇 달 전 마트에서의 악몽이 떠올랐다. 직불카드가 잔고 부족으로 안 되는 바람에 카트에 가득 실은 식료품들을 다시 진열대에 갖다 놓고 나와야 했다. 카드를 집어넣고 4자리 비밀번호를 치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엔터키를 눌렀다. ‘Card Approved’(카드 승인) 메시지가 뜨는데 이렇게 기쁠 수가! 지갑이 가벼워지면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월급통장의 고마움, 예전에 미처 몰랐네

방송국 다닐 때는 몰랐다. 매달 꼬박꼬박 월급통장으로 돈이 들어온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그걸 알았으면 이렇게 겁 없이 휴직계를 던지고 요리 유학을 떠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틈틈이 선배들의 도움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런던의 고물가를 버텼는데 그것도 보수가 제때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학생 신분이니 한국에서처럼 마이너스통장 같은 건 기대할 수도 없었다. 영국 은행의 계좌가 어쩌다 한번 130파운드(약 20만원) 정도 마이너스가 된 적이 있었는데 일주일 지나자 빨리 안 갚으면 형사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협박성 레터가 바로 날아왔다.


최후의 비상수단이 떠올랐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서랍을 뒤져서 처박아두었던 한국 신용카드 몇 장을 찾아냈다. 이런, 4장 중에 3장이 이미 유효기간이 지났다. 마지막 한장은 아직 등록 안 한 채 묵혀둔 카드였다. 한국시간으로 아침이 되기를 기다려 카드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하도 오래전에 수령한 카드라 비밀번호가 기억이 안 난다. 3회 시도 끝에 드디어 등록 완료. ‘야호’ 당장 이번주는 이걸로 막을 수 있겠네.


이욱정 피디의 르 코르동 블뢰 동급생들.
형편이 어렵기는 요리학교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학비는 대개들 입학 전 저축한 돈이나 대출로 해결했지만 나머지 생활비는 일주일 열심히 벌어 메운다. 런던 레스토랑의 시급은 보통 시간당 8파운드가 안 되니 학교 수업이 일찍 끝난 날 저녁이나 주말 내내 일해야 한다. 아침 8시 수업에 꾸벅꾸벅 조는 친구들은 그 전날 밤늦게까지 일하다 온 경우다. 그렇게 일해도 월세 내고 이것저것 쓰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새 옷 살 돈이 없으니 언제나 똑같은 셔츠에 무릎이 해진 청바지, 다 떨어진 운동화를 신고 다닌다. 먹는 것도 수업시간 만든 요리로 대충 때우거나 담뱃값도 아까워 잎담배를 손수 말아 피운다.(공강 시간 양지에서 서너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치면 십중팔구 사제담배 제조중이다.)

요리학교 학생 중 5%만이 셰프로 은퇴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르 코르동 블뢰에는 ‘있는 집’ 자제분들도 많다. 부자도 보통 부자가 아니라 슈퍼리치(super rich)다. 월요일 수업에 유난히 피곤해 보여 물어보면 주말에 스위스 알프스에 가서 스키 타고 왔다고 한다든지 취미가 뭐냐고 물어보면 클래식카 수집이라고 하는 친구도 있다. 집에서 호랑이를 애완용으로 키운다는 학생도 있었는데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손꼽히는 타이 재벌가의 딸이었다.

르 코르동 블뢰의 좋은 점은 부유하건 가난하건 서로 티 내는 법 없이 잘 어울린다는 것. 학교 유니폼 입고 앞치마 두르고 오븐 앞에서 땀 흘릴 때는 모두가 평등하다. 학교 끝나면 온종일 연기 나는 주방에서 굴러야 하는 시급 8파운드의 동네 레스토랑의 코미셰프(견습요리사)라고 무시당하는 법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만약 그 친구가 레시피를 머릿속에 꿰고 있고 양갈비를 기막히게 잘 구울 수 있다면 그는 동급생의 우상이 되었다. 배경도 학벌도 아니었다. 르 코르동 블뢰 주방에서는 요리 잘하는 사람이 무조건 최고 대접을 받았다.

‘없는 집’ 학생들은 생계를 위해 요리를 배우러 왔지만 ‘있는 집’ 학생들은 취미로 요리를 배웠다. 졸업 뒤 ‘없는 집’ 친구들은 제대로 된 자기 레스토랑을 갖기 위해 10년 넘게 남의 주방에서 고생해야 한다. 반면 ‘있는 집’ 친구들은 단기간의 경력만 쌓고도 자본이 있으니 쉽게 오너셰프가 될 수 있다. 시작은 어떨지 모르나 누가 셰프로 끝까지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르 코르동 블뢰의 셰프 한분이 수업중에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 교실의 많은 수가 평생 셰프의 길을 가리라 꿈꾸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 중에 오직 5%만이 셰프로 은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다면, 스타가 되기를 원한다면 어서 다른 길을 택하십시오.”

부르르 문자가 온다. 왕재수 집주인 피터다. “Hi, Wook. Don’t forget the rent. Cheers!“

글 KBS PD(www.kbs.co.kr/cook)·사진 제공 최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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