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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1.03 11:29 수정 : 2011.11.09 17:16

다큐멘터리 <누들로드> 촬영 당시 중국 만리장성에서 함께 사진을 찍은 켄 홈(오른쪽)과 이욱정 피디.

[esc] 누들로드 이욱정 PD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
20. 세계적 스타 요리사 켄 홈과의 만남…덕분에 누들로드 거쳐 요리 유학까지

메일을 열어보니 반가운 편지가 한 통 와 있었다. <누들로드>를 진행했던 켄 홈이었다. 런던에 올 일이 있으니 같이 만나 저녁을 먹자는 내용이었다. 셰프 켄 홈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멘토 중 한 사람이다. 방송사를 휴직하고 요리 유학을 오게 된 것도 어쩌면 그의 영향 때문이었다. 켄과의 인연은 5년 전쯤 런던의 한 책방에서 시작됐다. 해외 촬영을 가면 아무리 바빠도 틈을 내서 들르는 곳이 있는데 바로 서점의 요리책 코너이다.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먹음직스러운 음식사진과 개성 넘치는 셰프들의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이 책 저 책 옮겨다니면서 ‘눈팅’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진다.

특히 <비비시>(BBC)에서 펴낸 쿠킹 북들은 대부분 티브이 프로그램과 결합된 것이어서 직업 본능상 더 열심히 뒤져 보게 된다. 그날도 아시아 음식을 테마로 한 비비시의 쿡 북들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한 권의 흥미로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켄 홈의 중화요리’(Ken Hom’s Chinese Cookery). 책의 띠지를 보니 ‘100만권 넘게 팔린 밀리언셀러’라고 적혀 있었다. ‘켄 홈, 특이한 이름이군. 그런데 대체 무슨 요리책이길래 100만권 넘게 팔린 거야. 그것도 중국요리가 말이지!’ 저자의 사진을 보니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몸, 반짝이는 대머리와 치아를 드러낸 환한 미소, 무언가 마력 같은 포스가 풍겨났다.

런던 서점에서 ‘켄 홈’ 두 글자 머리에 담아

누들로드 이욱정 PD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 일러스트레이션 김윤재
저자는 중국계 미국인 셰프였다. 레시피를 훑어보니 요리하기는 어렵지 않으면서도 왠지 만들어 보면 맛이 제대로 날 것 같았다. 책 내용을 자세히 보니 레시피만 달랑 써놓지 않고 중국음식의 역사, 기본개념과 조리도구에 대해서도 알기 쉽게 정리해 놓은 점이 특별했다. 망설임 없이 책을 집어 들었고 대머리 요리사의 중화요리 쿡 북은 내 책장 눈에 잘 띄는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물론 책을 살 때 불타는 의욕과는 달리 켄 홈의 주옥같은 레시피를 부엌에서 내 손으로 요리할 기회는 없었다.(사실 이것은 아마존에서 요리책을 지를 때마다 되풀이되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켄 홈이라는 이름 두 자는 내 기억 한구석에 또렷이 남았다. 그 덕에, 1년 뒤 다큐멘터리 <누들로드>를 위해 한국 밖에서도 통할 수 있는 국제적인 프리젠터(발표자)를 기용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후보는 켄 홈이었다.

하지만 예상되는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비비시의 유명 진행자를 프리젠터로 섭외해 보겠다고 하자 찬성보다는 반대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한국 다큐에 외국인 프리젠터가 나오면 시청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어?”, “엄청난 출연료를 요구하면 어떻게 할 건데?” 그러나 시도해 보지도 않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인터넷에서 그의 이메일 주소를 찾아내 무작정 메일을 보냈다. 국수를 통해 본 인류문명사를 들여다보는 다큐멘터리의 프리젠터가 되어달라고. 편지를 보내긴 했지만, 속으로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세계적인 스타 셰프가 지구 반대편 아시아의, 생면부지의 피디가 보내온 기획안(다소 엉뚱해 보일 소지가 다분한)에 얼마큼의 관심을 보일지는 솔직히 의문이었다.

몇 주 뒤, 짧은 답신이 날아왔다. 파리 몽마르트르 부근 그의 아파트에서 한번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주소가 적힌 메모 한 장을 들고 파리로 날아갔다. 몽마르트르 부근의 골목을 찾아들어가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백만장자로 알려진 스타 셰프 켄 홈이 살 만한 고급 주택가가 아니었다. 메모에 적힌 주소지를 찾아 계속 걸어가다 보니 골목 끄트머리에 오래된 아파트 하나가 나왔다. 건물 3층으로 올라가자 계단 끝에 새로 칠한 듯 산뜻해 보이는 흰색 나무문이 나타났다. 노크를 하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이 집이 진짜 켄 홈네가 맞는 거야?’ 잠시 뒤, 문이 열리고 비비시 요리책에서 보았던 대머리 셰프가 활짝 웃으며 나타났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아파트 한 동 전체가 켄 홈 소유였다.) 그리고 이어진 두 시간여의 잔뜩 긴장한 프레젠테이션. 나는 그에게 비비시 수준의 거액 출연료를 약속할 수도, 일등석 항공권이나 특급호텔 숙박 같은 럭셔리한 촬영조건을 제시할 수도 없었다. 진심을 담아 전달하려 했던 메시지는 딱 하나였다. “동서 문명을 이었던 미지의 누들로드로 함께 모험을 떠나보자!” 진지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메모까지 해가며 다 듣고 난 켄 홈. 그의 마지막 멘트는 간결했다. “재미있을 것 같아요! 가봅시다!”

중국과 유럽을 오가며 진행된 누들로드 켄 홈 등장 장면의 촬영은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잠도 못 자고 식사도 제때에 못하면서 아침부터 밤까지 촬영이 진행됐다. 한국 제작팀 스태프들이야 워낙 이런 스파르타식 제작 일정에 익숙해진 탓에 버틸 수 있었지만, 켄 홈에게는 예상도 못한 생고생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촬영에 임해주었다.


초일류 셰프는 ‘식신피디’ 넘어서는 대식가

같이 촬영하면서 알게 된 켄 홈 셰프의 특징 한 가지. 뭐든지 너무 잘 먹는다. 세계 초일류 호텔의 레스토랑 컨설팅을 평생 해온 사람이라 고급스러운 요리만 좋아하지 않을까, 처음 출장을 같이 나가는데 은근히 걱정이 앞섰다. 우리 출장비의 하루 식대로 먹을 수 있는 메뉴가 빤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웬걸, 다 쓰러져 가는 중국 시골식당(중국 시골을 여행해본 분들은 그곳 식당들의 평균적인 위생 상태가 어떤지 아시겠지만)에 들어가도 마지막까지 제일 맛있게 먹는 사람은 켄이었다. 나도 방송국에서 ‘식신피디’ 또는 ‘걸신피디’로 불릴 정도로 가리지 않고 많이 먹는 편이었지만 그의 초인적 식성 앞에서는 바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켄 홈 셰프와의 인연은 <누들로드> 제작이 끝나고도 계속됐다. 좋은 음식 프로그램을 만들려면 프로듀서도 요리를 제대로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을 해준 것도 그였고, 어떤 학교를 가는 것이 좋을지, 어떤 코스를 들으면 괜찮을지 자문해준 것도 그였다. 그리고 바쁜 와중에도 요리학교에 추천서를 직접 써준 것도 그였다. 유학을 떠나기 전 그가 해준 조언 한마디는 내 가슴에 와 닿았다. “이 감독, 르 코르동 블뢰에서 공부할 때 꼭 기억할 것이 있어요. 요리학교에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니에요. 더 중요한 것은 요리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에요. 당근을 똑같은 크기로 재빨리 채썰 수 있는 요리사는 세상에 많지만, 당근으로 새로운 레시피를 생각해낼 수 있는 요리사는 드물지요.” (다음편에서 이어집니다.)

이욱정 KBS PD(www.kbs.co.kr/cook)

일러스트레이션 김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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