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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누들로드> 촬영 당시 중국 만리장성에서 함께 사진을 찍은 켄 홈(오른쪽)과 이욱정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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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누들로드 이욱정 PD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
20. 세계적 스타 요리사 켄 홈과의 만남…덕분에 누들로드 거쳐 요리 유학까지
메일을 열어보니 반가운 편지가 한 통 와 있었다. <누들로드>를 진행했던 켄 홈이었다. 런던에 올 일이 있으니 같이 만나 저녁을 먹자는 내용이었다. 셰프 켄 홈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멘토 중 한 사람이다. 방송사를 휴직하고 요리 유학을 오게 된 것도 어쩌면 그의 영향 때문이었다. 켄과의 인연은 5년 전쯤 런던의 한 책방에서 시작됐다. 해외 촬영을 가면 아무리 바빠도 틈을 내서 들르는 곳이 있는데 바로 서점의 요리책 코너이다.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먹음직스러운 음식사진과 개성 넘치는 셰프들의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이 책 저 책 옮겨다니면서 ‘눈팅’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진다.
특히 <비비시>(BBC)에서 펴낸 쿠킹 북들은 대부분 티브이 프로그램과 결합된 것이어서 직업 본능상 더 열심히 뒤져 보게 된다. 그날도 아시아 음식을 테마로 한 비비시의 쿡 북들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한 권의 흥미로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켄 홈의 중화요리’(Ken Hom’s Chinese Cookery). 책의 띠지를 보니 ‘100만권 넘게 팔린 밀리언셀러’라고 적혀 있었다. ‘켄 홈, 특이한 이름이군. 그런데 대체 무슨 요리책이길래 100만권 넘게 팔린 거야. 그것도 중국요리가 말이지!’ 저자의 사진을 보니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몸, 반짝이는 대머리와 치아를 드러낸 환한 미소, 무언가 마력 같은 포스가 풍겨났다.
런던 서점에서 ‘켄 홈’ 두 글자 머리에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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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들로드 이욱정 PD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 일러스트레이션 김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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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일류 셰프는 ‘식신피디’ 넘어서는 대식가 같이 촬영하면서 알게 된 켄 홈 셰프의 특징 한 가지. 뭐든지 너무 잘 먹는다. 세계 초일류 호텔의 레스토랑 컨설팅을 평생 해온 사람이라 고급스러운 요리만 좋아하지 않을까, 처음 출장을 같이 나가는데 은근히 걱정이 앞섰다. 우리 출장비의 하루 식대로 먹을 수 있는 메뉴가 빤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웬걸, 다 쓰러져 가는 중국 시골식당(중국 시골을 여행해본 분들은 그곳 식당들의 평균적인 위생 상태가 어떤지 아시겠지만)에 들어가도 마지막까지 제일 맛있게 먹는 사람은 켄이었다. 나도 방송국에서 ‘식신피디’ 또는 ‘걸신피디’로 불릴 정도로 가리지 않고 많이 먹는 편이었지만 그의 초인적 식성 앞에서는 바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켄 홈 셰프와의 인연은 <누들로드> 제작이 끝나고도 계속됐다. 좋은 음식 프로그램을 만들려면 프로듀서도 요리를 제대로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을 해준 것도 그였고, 어떤 학교를 가는 것이 좋을지, 어떤 코스를 들으면 괜찮을지 자문해준 것도 그였다. 그리고 바쁜 와중에도 요리학교에 추천서를 직접 써준 것도 그였다. 유학을 떠나기 전 그가 해준 조언 한마디는 내 가슴에 와 닿았다. “이 감독, 르 코르동 블뢰에서 공부할 때 꼭 기억할 것이 있어요. 요리학교에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니에요. 더 중요한 것은 요리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에요. 당근을 똑같은 크기로 재빨리 채썰 수 있는 요리사는 세상에 많지만, 당근으로 새로운 레시피를 생각해낼 수 있는 요리사는 드물지요.” (다음편에서 이어집니다.) 이욱정 KBS PD(www.kbs.co.kr/cook) 일러스트레이션 김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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