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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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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들로드 이욱정 PD의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
(23) 고급반 최종 테스트 학생 레스토랑에서 펼친 19세기 요리의 진수
어느덧 졸업반이 되었다. 떨리는 발걸음으로 처음 르 코르동 블뢰의 문턱을 넘어섰을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말이다. 졸업이 가까워 오자 교실 분위기가 전과 달랐다. 교수의 테크닉을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모두 눈에 불을 켜고 수업에 임했다. 취업 걱정 때문이었다. 르 코르동 블뢰를 나오면 런던이나 유럽 대도시의 일반적인 레스토랑에서 일자리를 얻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손을 꼽을 수 있는 미슐랭 투 또는 스리 스타급 레스토랑에 들어가는 것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급료로만 따지자면 일반 레스토랑이 더 나은 경우가 많다. 최고의 레스토랑들은 한 푼 안 받고도 그저 일만 배우게 해주십사 간청하는 일류 요리학교 졸업생들이 말 그대로 줄을 섰기에 좋은 보수를 절대 바랄 수 없다.
요리 실력 못지않게 중요한 레스토랑 스펙
그럼에도 생활비가 당장 급한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졸업반 학생들 거의 모두 교통비만 받더라도 초일류 레스토랑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요리 실력 없이 스펙만 가지고 절대 버틸 수 없는 바닥이 셰프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안타깝게도 스펙에 가장 목을 매는 곳도 주방이기 때문이다. 미슐랭 스리 스타의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 중에 하나는 르 코르동 블뢰 셰프의 추천이다. 셰프의 인증을 받으려면 주방에서 확실히 두각을 나타내야 한다. 그러니 졸업반 학생들이 수업시간 내내 긴장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무리 중에 우뚝 설 절호의 기회가 하나 있다. 고급반의 최종 테스트 과정 중의 하나인 학생 행사(Student Event)다. 이전 레벨과 달리 고급반의 마지막 시험에는 필기와 실기고사 말고도 또 하나의 관문이 포함돼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학생 행사’다. 그 이름은 참 간단하게 들리지만 내용은 그게 아니다. 학생들 스스로가 각 파트를 맡아 실제 레스토랑을 열어보는 것이다. 오직 딱 하루의 만찬!
조리의 전 과정은 물론이고, 레스토랑 콘셉트 정하기, 메뉴의 선정, 그릇 고르기, 테이블 꾸미기, 서빙과 티켓 판매, 홍보까지 학생들이 각자 역할을 분담한다. 일종의 모의전투랄까, 졸업하여 실전에 투입되기 전에 전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체험해보는 과정이다.
학생 행사 2주 전 정규 수업이 끝난 저녁 졸업반 전원이 모였다. 하루 종일 수업으로 다들 녹초가 된 상태고 저녁식사도 제대로 못한 채 회의가 시작되었다. 한차례의 디너 이벤트라 대충 할 일 정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토론이 한번 불이 붙기 시작하자 1시간을 예정으로 했던 회의는 3시간 가까이 계속됐다. “폴 보퀴즈의 대표적인 레시피를 재연해보면 어떠냐?” “아니다, 누벨 퀴진도 이제는 지루하다.” “재패니즈 퀴진의 미니멀리즘을 시도해보자.” “그건 오버다. 여기는 프랑스 요리학교지 스시 아카데미가 아니다.”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독일의 옥토버 페스티벌 콘셉트를 가져오면 어떠냐!” “그건 더 웃기다.” 서양 친구들은 논쟁에 능하고 자기주장이 거침없다. 한국에서 촬영하다 보면 말 잘하는 셰프 찾기가 갈치 살에서 잔가시 골라내는 것만큼 어려운데 유럽에서는 학생들조차도 자기 요리에 대한 철학이 뚜렷하고 표현이 유창하다. 그날도 역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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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완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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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에서의 역할도 그날 정해졌다. 평소 수업 시간에는 자기 요리를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 조리했다면 학생 행사에서는 레스토랑 주방처럼 철저한 분업이었다. 아뮈즈부슈(애피타이저를 먹기 전에 입맛을 돋우는 음식)를 맡은 카나페 팀, 차고 더운 전채요리의 앙트레(서양 코스요리에서 생선요리와 로스트 사이에 나오는 요리) 팀, 고기요리를 담당할 메인 파트, 디저트와 빵을 만드는 파트, 와인을 선정하고 서빙 할 소믈리에와 전체 경영과 홍보를 맡는 매니지먼트 팀까지 자기가 원하는 부서로 인원 배정이 이루어졌다. 메뉴도 조별 토론 끝에 정했다. 같이 어울려 수업받을 때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막상 우리들끼리 이렇게 준실전상황에 던져지니 자연스럽게 리더가 부상했다. 똑같은 초등학교 6학년 교실에 앉아 있어도 한글이 버거운 아이가 있는 반면, 천자문에 영어까지 능수능란한 아이도 있는 법. 내가 지원한 메인 요리팀의 경우는 포르투갈에서 온 터프가이 휴고가 군계일학이었다. 프랑스 요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 건장한 풍채에, 낮은 허스키 목소리까지. 우리는 그의 강렬한 돼지족발 대세론에 순식간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날 휴고가 어찌나 우러러보이던지! 나한테 이 정도였으니 여학생들 눈에는 어찌 보였겠나?(휴고는 결국 런던의 미슐랭 투 스타 레스토랑에 취업했고 브라질에서 온 동급생 마리아나와 결혼했다! 그래~ 내 그럴 줄 알았지.) 햇병아리들 어엿한 셰프로 태어나다 이렇게 해서 결정된 학생 행사의 메뉴. 아뮈즈부슈로는 신선한 해물과 올리브를 이용한 5가지 종류의 카나페, 전채요리는 푸아그라 요리, 메인은 부르고뉴풍의 돼지족발, 디저트는 다크 카카오 맛의 초콜릿 퐁당으로 마무리되는 코스였다. 신기하고 뿌듯했다. 입학했을 때만 해도 주방에서 어찌할 줄 몰라 갈팡질팡 헤매던 햇병아리들이 이제 셰프의 태를 서서히 갖추게 되었다. 늦은 밤까지 르 코르동 블뢰 교실의 불이 꺼지지 않는 날이었다. 당연히 만찬은 대성공이었다. 손님들은 접시 하나하나에 감탄했다. 내년에도 20파운드 디너 티켓을 망설이지 않고 살 것이 분명했다. 행사의 끝 순서. 주방의 학생들이 차례로 호명되어 홀로 입장했고 테이블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아주 오랫동안 터져 나왔다. 한 사람의 셰프가 탄생하는 떨리는 순간이었다. 글 KBS PD(www.kbs.co.kr/cook)·사진 제공 최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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