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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창간 23돌> 포장이사·탑차 도입 업계 선두
‘대기업과 경쟁’ 1위 브랜드 수성
‘출혈’ 택배시장서 서비스 승부수
그는 열네살 때부터 이삿짐을 날랐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중학교 입학도 엄두를 내지 못하던 그는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서울로 올라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며 꿈을 키웠다. 그리고 주말에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이삿짐센터에서 천직을 찾았다.
케이지비(KGB) 물류그룹의 역사는 박해돈(52) 회장의 인생역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아홉살 나이에 이삿짐센터에 취업해 경험을 쌓은 뒤 1983년 스물네살에 세운 이사 전문업체 ‘이사공사(2404)’가 바로 오늘날 케이지비의 모태다. 1980년대의 고도성장 바람을 타고 이사 수요가 크게 늘어난 것은 케이지비가 빠른 속도로 자리잡도록 만든 토양이 됐다.
무엇보다도 케이지비란 이름을 사람들 머릿속에 뚜렷하게 각인시킨 건 바로 1986년 업계 최초로 포장이사를 도입하면서부터다. 굳이 고객이 함께 거들지 않더라도 이사 전문가가 파손방지용 박스로 포장해 이삿짐을 나르고 업체가 이삿짐을 일정기간 보관하는 새로운 형태의 서비스를 개발해낸 것이다. ‘출근은 내 집에서, 퇴근은 새 집으로’라는 구호는 바로 국내 이사 문화에 한 획을 그은 케이지비의 작품이다. 용달차 대신 뚜껑이 있는 화물차(탑차)나 사다리차를 도입하고, 화물차에 맞춘 포장박스도 잇따라 개발했다. 그 덕분에 대기업과의 경쟁 속에서도 20%를 웃도는 시장점유율을 기록하며 이사업계 1위 브랜드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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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 도척면 진우리에 있는 케이지비(KGB) 본사 모습. 1986년 포장이사를 국내 처음으로 도입해 새바람을 일으킨 케이지비는 30년간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난해 몽골 시장에 본격 진출했다. 케이지비택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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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케이지비택배는 질 높은 서비스로 경쟁하기로 했다. 1000원을 더 주더라도 맡기고 싶은 회사로 키워 운송노동자도, 고객도 만족시키겠다는 전략이다. 박 회장은 요즘도 영업소를 불시에 방문해 직접 현장에서 발로 뛰며 서비스 향상에 노력하고 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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