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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5.16 22:46 수정 : 2011.06.03 15:08

1909년 10월22일 하얼빈에 도착한 뒤 안중근(왼쪽부터) 의사가 우덕순·유동하 동지와 함께 하얼빈역 주변을 사전 답사하고 열차 시간 등을 확인한 뒤 한 중국인 사진관에서 찍은 기념사진.(위 사진) 1974년 서울 남산의 안중근의사기념관 앞에 세워졌던 양복 차림의 안 의사 옛 동상과 2009년 새로 만든 동상.(아래 오른쪽) 유일한 양복 차림인 이 사진은 최서면 원장이 의거 당시 만주지역에서 발행된 신문 기사 등을 통해 ‘사진관에서 빌려 입고 찍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하얼빈 의거 100돌을 맞아 2009년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조각가 김경승의 작품이었던 옛 동상을 철거하고, 의거 당시 옷차림으로 새 동상을 제작했다. 그러나 안중근기념관의 누리집은 물론, 독립기념관에서 펴낸 <안중근 문집>과 여러 안 의사 자서전에서는 이 양복 차림 사진을 여전히 망명 이전 황해도 진남포에서 안 의사가 설립해 운영했던 삼흥학교 교장 시절 모습 또는 그런 설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최 원장은 <안응칠 역사>를 비롯한 출처가 분명하게 밝혀진 기록들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잘못된 사실을 그대로 방치한 채 무조건 추앙하려는 학계의 안중근 연구 풍토를 안타까워했다.

최서면의 안중근을 찾아서 ②
이토 단죄이유 쓴 ‘옥중 소회’… 순국 3주 만에 나온 첫 전기 ‘불령문서’ 10만장 뒤져 발굴
안응칠 의거~사형 순간까지 일제가 기록관·증언자 된 항일운동 ‘역사의 아이러니’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은 1969년 겨울 도쿄의 고서점을 통해 스에마쓰 교수로부터 <안응칠 역사>를 건네받아 처음 읽었던 순간의 감동을 묻자 노산 이은상이 펴낸 <안중근 의사 자서전>의 서문을 펼쳐 한 대목을 짚었다.

 “안 의사가 진실한 자기 심정을 표백해 놓은 글이라, 저절로 고상한 문학서가 되었고, 또 한말의 풍운 속에서 활약한 자기 사실을 숨김없이 적어놓은 글이라, 바로 그대로 중요한 사료가 되어진 것이다.”

 노산이 79년 9월 안중근 의사 탄신 100돌에 맞춰 책을 펴내면서 원전인 ‘안응칠 역사’의 의미를 밝혀놓은 바로 그 구절이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 했다.

 최 원장은 ‘안응칠 역사’는 모든 안중근 연구의 시발점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라 ‘150일간의 옥중 투쟁기’이고,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뜻은 사사롭거나 감정에 따른 복수가 아니라 일제의 죄악상을 전세계에 고발하고 자신의 동양평화사상을 널리 알리고자 했음을 확인시켜주는 원전”이라는 것이다. 

 

 -‘안응칠 역사’를 가장 먼저 읽은 한국인 독자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안중근 연구가’로 명성을 날리신 셈인데, 안 의사에 대한 탐구는 어떤 계기로 하게 되셨는지요?

 “63년 안중근의사숭모회를 만들 때부터 발기인으로 앞장섰던 노산이 2대 이사장을 맡아 안중근의사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면서 ‘도와달라’는 요청을 해왔어. 그래서 틈날 때마다 국회도서관과 진보초의 고서점가 등을 다니며 안 의사 관련 자료를 찾고 있었던 거야. 또 안 의사를 알만한 일본인들을 수소문하기도 했어. 그 가운데 안 의사 의거 당시 조선통감부의 외사경찰이었던 아이바 기요시를 만난 건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안 의사가 하얼빈역 의거 현장에서 체포당해 뤼순 형무소에서 순국할 때까지 사진들은 대부분 소노키 스에키 당시 통역관이 보관해둔 건데, 그걸 아이바의 도움으로 발굴해서 70년 안중근기념관이 개관하기 전에 안중근숭모회에 기증했어. 처음엔 그렇게 노산을 돕는 차원이었지. 그러다 ‘안응칠 역사’를 읽어본 뒤에야 비로소 안 의사의 위대함을 깨닫고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던 거야.”

 -아이바 기요시라면 경찰 통역관 출신으로 간도총영사관 경찰부장을 지내며 평생토록 이른바 ‘불령선인’, 항일독립운동가들을 감시한 인물 아닌가요?


 “아이바는 구마모토현 출신인데 일제는 이 지역을 대외진출 거점으로 삼아 일찌기 구마모토 가쿠엔대학에 조선어학교를 개설하는 한편 유학생을 파견했다고해. 1890년대 후반에 지금의 서울 남산 한국의집 자리에서 10여년간 ‘낙천굴’이란 기숙학교를 열었는데, 아이바를 비롯해 안 의사 취조를 위해 통감부에서 파견한 사카이 경시, 통역관 소노키 스에키가 모두 이 학교 동창생이라고 했지. 이 세 사람과 안 의사의 사진에 얽힌 이야기는 이 다음에 자세히 얘기하기로 하고, 암튼 60년대 당시 아이바는 일한친선협회 회원이자 일본 외무성 고문을 맡고 있었어. 어느날 우연히 한 잡지에서 그가 기고한 한국 관련 글을 보고 찾아갔더니 안 의사의 거사 직후에 있었던 ‘안응칠’이란 이름에 얽힌 일화를 들려주더군. ‘1909년 10월26일 밤늦게 한성(서울)의 통감부로 전통이 도착했다. “운치안이라는 조선인이 이토 통감을 죽였다. 그에 대한 조사 기록을 보내라.” 초비상이 걸려 심야 간부회의가 소집됐는데, ‘불령선인’(블랙리스트) 명단에 ‘운치안’은 없었다. ‘운’가는 국세조사에도 없는 성씨였다. 그러다 어느 과장이 러시아 검찰에서 조사한 이름이니 서양식으로 표기한 것 같다고 해서 ‘안운치’로 읽어보니 비슷한 발음의 ‘안응칠’이 나왔다. 비로소 안중근 기록을 찾아 이튿날 하얼빈으로 통보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이름 때문에 일제가 안 의사의 신원을 찾는 데 애를 먹었던 거야.”

 -그런데 ‘응칠’이란 안 의사의 어릴 적 이름은 웬만하면 알기 어려웠던 게 아닌가요? 그 내력도 그렇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모를 텐데.

 “안 의사가 뤼순 형무소에서 1909년 12월13일부터 이듬해 3월15일까지 93일에 걸쳐 써내려간 ‘안응칠 역사’는 무엇보다 하얼빈 의거 이후 반세기 동안 구전과 증언으로만 전해오던 안 의사에 대한 수많은 의문들을 풀어줬어. 첫머리에서 밝힌 자신의 이름 ‘응칠’의 내력부터가 그랬어. ‘1879년 기묘년 7월16일, 대한국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나니 성은 안(安)이요, 이름은 중근, 자는 응칠(성질이 가볍고 급한 편이기에 이름을 중근이라 하고, 배와 가슴에 일곱개의 검은 점이 있어 자를 응칠이라 함)이라 하였다.’ 안 의사는 1905년 을사늑약(한일협상조약) 강제체결로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고향 청계동을 떠나 항일 구국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데 그 이후 의거 때까지 ‘중근’ 대신 ‘응칠’을 이름으로 썼다고 해.”

 -그때부터 안중근 연구회도 만들고 본격적으로 안중근 연구에 나선 걸로 아는데.

 “69년에는 ‘안응칠 역사’ 발견 말고도 개인적으로 몇가지 의미있는 변화가 있었어, 마침 그해 4월 아세아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한국연구원의 문을 열었지. 한국연구원에는 ‘김옥균 연구회’가 먼저 꾸려져 있었고, 옥중수기 공개를 계기로 ‘국제 안중근 연구회’도 만들었어. 주로 현직 대학교수와 일본 언론사 논설위원들이 참여해 매월 발표회를 열기 시작했지. 연구회를 만들었으니 공부를 해야잖아? 그때 내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일본 외무성의 외교사료관이었어. 옥중수기를 보면 안 의사가 하얼빈이 아닌 관동도독부 뤼순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과정과 뤼순 형무소 생활이 자세히 나와 있잖아. 당시 관동도독부는 일제가 청일전쟁에서 이긴 뒤에 설치한 일종의 점령지 통치기관이었으니까, 관련 기록이 모두 외교사료관에 있을 것으로 판단했던 거야. 예상대로 외교사료관은 일제의 조선 침략사, 우리한테는 항일 독립운동사를 밝혀줄 기록의 보고였어.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지. 나중엔 일본 근대 외교사 문서를 일본 사람보다 더 많이 읽은 ‘괴물 한국인’이란 소문이 나기도 했어. 요즘엔 외교사료관장부터 혹시 이런 자료 봤냐고 나한테 물어보러 와.(허허)”

 (최 원장은 69년 4월 ‘탈아입구론’으로 일제의 대륙 침략 단초를 제공하고 게이오 의숙을 설립한 자유주의 교육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딸이 제공한 그의 사저에 도쿄 한국연구원의 문을 열었다. 후쿠자와는 1884년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이 몸을 의탁했던 인물이다. 최 원장은 57년 5월27일 서울대교구장인 노기남 주교의 주선으로 미 군용기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한 이후 초기 5년 동안 주로 국회도서관을 다니며 ‘한국 역사’ 공부를 했고 특히 ‘김옥균’과 천주교 관련 연구에 몰두했다.)

 -외교사료관이 기록의 보고라고 말씀하셨는데 안 의사와 관련해서 찾아낸 중요 기록들은 어떤 게 있나요?

 “물론 ‘안응칠 역사’의 원전은 아직도 나오지 않았어. 대신 76년에 ‘안응칠 소회’ 원본을 찾아냈지. 1909년 11월 6일 안 의사가 소노키 통역을 통해 뤼순 형무소장 구리하라 사다키치에게 써준 짧은 글인데, 연필로 쓴 친필이었지. 의거 직후 현장에서 체포된 안 의사는 하얼빈 관할 러시아 검사 밀레르로부터 인정신문을 받은 뒤 그날 저녁으로 일본총영사관으로 인계됐고, 그 이틀 뒤 뤼순 법원으로 사건이 송치돼 11월3일 뤼순 형무소에 수감됐잖아. 뤼순에서 검찰관 미조부치 다카오와 통감부에서 파견한 사카이 경시에게 번갈아가며 본격적인 취조를 받았지. 그런데 ‘왜 이토를 죽였느냐’며 같은 내용을 자꾸 물어보니까 아예 적어줬던 거야. 이토를 단죄한 이유 15가지를 밝힌 ‘이토 히로부미 죄악’과 함께 ‘안응칠 소회’를 써준 거지. 사실 그때까지 안 의사는 신문 때 제대로 답을 하지 않았다고 해. 다른 동지들을 보호해야 했거든. ‘슬프다 천하대세를 멀리 걱정하는 청년들이 어찌 팔짱만 끼고 아무런 방책도 없이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옳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생각다 못해 하얼빈에서 총 한발로 만인이 보는 앞에서 늙은 도적 이토의 죄악을 성토하여 뜻있는 동양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안 의사의 기개가 느껴지지 않아?”

 -외교사료관에서 안 의사 기록을 찾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를 한참 뒤에야 알게 됐지. 그건 애초 외교사료관에서 사료를 ‘안중근’ 또는 ‘안응칠’이란 제목으로 분류해놓지 않았기 때문이었어. 더 정확하게는 일제 때 조선인 이름의 제목으로 작성한 문서나 사건 보고서 자체가 없었던 거야. 훗날 찾아보니 ‘불령단 관계 잡건’(不逞團關係雜件)이란 제목으로 분류해 놓았더라구. 무려 10만장쯤 될 거야. 이봉창 의사의 히로히토 천황 폭탄투척 사건의 기록은 ‘대정 몇년 … 불령선인 사건’(부제: 앵전문 사건)으로 묶여 있는 식이지. 안중근 의거 사건 파일 제목은 ‘구라치 데쓰키치 정무국장이 뤼순 출장 중 수집한 자료’였어. ‘안응칠 소회’도 바로 그 문서철 안에 들어 있었지. 구라치 국장은 지난해 내가 처음 공개한 <구라치 회고록-한국병합의 경위>(1939년)의 주인공인데, 의거 당시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의 밀령을 받고 뤼순에서 한달 넘게 머물며 안 의사의 재판과 사형까지 총지휘한 구라치 외무성 정무국장이 본국에 보고한 문서철이야. 그러니 한국 연구자들이 무턱대고 외교사료관에 가서는 아무것도 찾아낼 수가 없어.”

 (최 원장은 94년부터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소장된 사료 5만 책을 일일이 뒤져 찾아낸 자료들을 모아 2004년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소장 한국관계사료목록 1875∼1945>(국사편찬위원회)를 펴냈다.)  

 -‘안응칠 역사’가 자전이라면 지난 95년에 선생님이 입수해 공개한 <근세역사> 일어본은 ‘최초의 안 의사 전기’가 확인됐다는 점에서 화제가 됐었죠.

 “역시나 문서의 제목은 ‘불령사건을 통해 본 조선인의 측면관’이었는데, 조선총독부 경무총장 아카시 모토지로가 1911년 7월에 작성한 것을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이 본국의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에게 ‘조선통치 참고용’으로 보고한 극비문서였어. 이 보고서에 ‘근세역사’에 대한 언급과 함께 당시 고등경찰이 번역한 ‘근세역사’의 일어본이 첨부돼 있었던 거지. ‘안 의사가 순국한 지 불과 3주 뒤인 1910년 4월15일 안 의사 전기가 한국내에서 나왔다. 흉도 안중근의 행동을 기술한 사본이 불령분자들 사이에 애독되고 있다. 불손하게도 ‘근세역사’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흉도의 의중을 헤아리게 하는 자료다.’ 이런 내용들이 적혀 있었지. 안 의사 순국 이후 이른바 특별고등경찰이 체포한 불령선인 거의 대부분이 이 책을 간직하고 있어서 통감부는 이를 발간한 사람을 잡아내기 위해 혈안이 됐지만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온 까닭에 이런 전기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었어. 다만, 그 내용과 실체가 역설적이게도 일제의 기록 덕분에 확인된 것이지. 그 이전까지는 1914년 백암 박은식 선생이 상하이에서 펴낸 <안중근>이 최초의 전기로 알려져 있었거든. 백암은 부친 안태훈 진사와 각별한 사이여서 어릴 때부터 안 의사를 지켜봤다고 해. 그래서 박은식 선생의 <안중근>은 최초가 아니라 해도, 지금까지 나온 수많은 전기 가운데 유일하게 안 의사를 직접 본 인물이 썼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아.”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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