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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양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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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26살, 당신의 삶도 돌볼 때입니다
우리 집은 화목한 집안이 아닙니다. 부친은 술 먹고 엄마한테 욕설하고 술주정 부리기 일쑤입니다. 예전부터 그랬습니다. 그나마 요새는 엄마가 아파서 덜하지만…. 그런 버릇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거기까지도 술 먹고 왔습니다. 우리 엄마는 말기 간경화 환자로, 목에 림프종까지 남아 있습니다. 간경화 합병증으로 병원에 2달 반가량 있다가 퇴원했습니다. 엄마가 퇴원한 뒤 저는 지역의 조그만 광고가게에 취업했지만, 새벽 4시까지 일을 시키길래 아니다 싶어 퇴사했습니다. 최근에는 친구가 일하고 있는 회사에 일자리를 얻어달라고 부탁해서 그리로 가려 했는데, 엄마가 걱정돼서 번복하고 또 번복했습니다. 제가 없는 사이 엄마가 혼수상태에 빠지면 어쩌나, 부친이 제대로 챙겨줄 것 같지도 않고, 엄마도 제가 그냥 집에서 하는 일을 구하길 바라는데…. 26살인 전 친구가 그리 많지도 않고, 대인관계 때문에 회사생활에 실패한 경험도 있거든요. 그래서 전 솔직히 친구 있는 회사에 있는 게 적응도 편하고…. 엄마에게 대구(제가 다니려는 회사가 대구에 있어요)로 같이 가서 살자 해도 싫다 하고, 평생 부친한테 언어폭력·술주정 당해왔고 지금도 그러니 이참에 부친이랑 이혼하고 재산분할해서 살자 하니 죽어도 그렇게는 안 한다네요. 도대체 이해가 안 갑니다. 여태까지 저에게 잘해주신 엄마에게 진 빚을 갚고 싶은데…. 이 집에 같이 살면서 그러고 싶지는 않고, 그냥 저와 같이 따로 나가 살면 될 것 같은데, 엄마는 그렇게는 죽어도 안 한다 하니 미칠 지경입니다. 회사에는 간다고 말은 해놨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민상담은 gomin@hani.co.kr
누구의 삶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어 → 글쓴님의 오랜 마음고생과 노고를 글에 다 담지는 않으셨지만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갑니다. 이 상황은 장기전입니다. 멀리 보시고 크게 대비하셔야 할 때죠. 상담 전에 일단 심호흡하면서 숨을 몸속으로 크게 들여서, 걱정과 고민으로 잔뜩 수축되어 있는 온몸의 관절과 근육들을 활짝 열어 보세요.
이 문제는 직장에 가느냐 마느냐의 OX식이 아니므로 기본적인 상황들을 점검해보면서 시뮬레이션을 생생히 해보면 어떨까요? 혹시 아버님께서는 본인이 해야 할 역할을 글쓴님이 감당해주고 있어서 더욱 방만하게 생활하고 내키는 대로 폭력적으로 굴곤 하는 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님 주변에 위급 상황에 도움을 청할 이웃이나 친척이 있나요?
만약 글쓴님이 부모님 때문에 이 기회를 포기할 때, 어쩔 수 없이 인간이므로 그에 대한 아쉬움과 원망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을 수 있고, 그 감정은 또한 부모와의 관계를 훼손시키는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구도 누군가를 돕거나 걱정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죠. 어머님도 어머님이 살아오신 인생의 맥락과 가치관에 따라 선택을 하신 것이지요. 글쓴님이라고 해도 어머님 자신보다 어머님을 위할 수는 없는 것. 이혼과 재산분할이라는 사건이 어머님의 가치관과 살아온 인생의 맥락에서는 더 끔찍하고 두려운 것일 수 있으니, 판단력이 흐려지는 단계가 아니고 설득할 만큼 하셨다면 그 결정을 존중해주셔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본인의 욕구와 필요에 충실한 선택을 하는 사람이 결과적으로는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인물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나 자신을 돌봐야 할 시점에서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 경우, 시간이 지난 뒤에 더 큰 무게감으로 주변에 아끼는 사람에게 큰 피해와 희생을 요구하게 되지요.
인생에 26살은 한번밖에 오지 않습니다. 제 수업시간에는 종종 10개 정도의 방석을 앞에 징검다리처럼 놓고, 1개당 10년의 시간이라고 상정한 뒤에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길을 천천히 걸어보게 합니다. 해당 나이의 방석을 지날 때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지, 어떻게 움직이고 싶은지를 보면서 유한한 인생과 되돌아갈 수 없음을 몸으로 느끼고 경험해보는 것이지요. 지금밖에 할 수 없는 일들, 지금 겪어내야 훗날을 대비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글쓴님이 자신의 선택에 따르시길 응원합니다.
한지영 무용심리치료사·힐링모션 대표
가능한 보완책을 준비하세요 → 만성적 알코올 문제로 인한 가장 심각한 아픔이자 후유증은 술 마시는 사람의 행위가 온 가족의 생활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죠. 배우자는 배우자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삶 전반이 뒤흔들리면서 마음에 멍이 듭니다. 아버지의 알코올 문제와 언어폭력, 어머니의 건강 악화. 무척 힘겨운 상황이네요.
자, 우선 님께서 어머니께 이혼을 제안하시는 부분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알코올 문제를 지닌 아버지로 인해 마음고생이 심한 어머니를 둔 자녀들이 어머니에게 이혼을 제안하는 일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가정이 가정의 의미를 잃고 아픔과 고통이 질기게 반복될 때 자녀들은 관계에서 약자인 어머니에게 이혼하라 말하게 되죠. 한없이 당하는 약자이자 피해자인 어머니의 억압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마음, 단절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절망감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건 그런 어머니들 상당수가 결코 이혼을 실제로 행하지는 않으신다는 겁니다. 알코올 문제자의 배우자를 알코올-공의존자라 하는데 그 연결고리가 생각보다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님께서 절망감과 고통을 종식시키고자 어머니께 이혼을 말씀드리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부모의 이혼 여부에 대해서는 한발 뒤로 물러나시는 것이 현재로서는 바람직해 보입니다. 당사자가 원치 않을 경우, 아무리 자식이라도 그 부분을 주장할 순 없지요. 또 님께서 잊지 마셔야 할 것은 부모로 인한 고통과 불안이 지배적인 상황이지만 26살 자신 또한 돌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님의 사회생활을 놓치거나 방기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알코올 문제의 아버지, 건강이 심히 악화된 어머니께 온 신경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은 맞습니다. 어머니와의 분리불안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돌보고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회생활의 기회를 자꾸 번복하시면 님의 삶마저 쇠약해지고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당장 해결나지 않는 부분, 지금 꼭 챙겨야 되는 부분, 가족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적치, 나의 삶을 위한 필수사항 등을 변별, 숙고하신 뒤 ‘가능한 보완책’과 ‘가장 현실적인 절충안’을 떠올리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김선희 임상심리전문가·김선희부부클리닉 원장·<가까운 사람들과 편하게 지내는 법> 저자
희생은 원망을 낳기 마련 → 님께서 보내주신 사연을 보니, 님은 술주정이 매우 심한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어머니를 진정 사랑하며, 더 나아가 어머니를 위해 자신의 직장까지도 바꿀 것을 고려하는 요새 보기 힘든 효자 혹은 효녀이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님께서는 이제 26살로 한창 직장을 구해 스스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아가야 할 매우 중요한 시기에 있기도 합니다. 어머니와 함께 살자니 직장 문제가 걸리고, 어머니를 떠나 새로운 직장을 위해 대구로 이사를 가자니 혼자 투병을 하고 계신 어머니가 마음에 걸리는 정말 힘든 상황이지요.
님의 다른 상황을 잘 모르는 저로서는 섣불리 뭐라 조언하기가 참 어렵네요. 그냥 제가 만약 님의 어머니라면 어떻게 할까 하는 마음으로 조언을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만약 님의 어머니라면 새로운 직장을 위해 떠나라고 말하겠습니다. 물론, 마음 한편으로는 본인과 함께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시기도 하겠고, 또 님에게 그런 의사를 비치기도 하셨지만, 아마 진심은 더 좋은 직장에 가서 잘 적응하기를 바라고 계실 겁니다. 님께서도 그렇게 새로운 직장에 갔다가 만약에 아니다 싶으면 다시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돌아올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이번에 어머니 때문에 새로운 직장에서 일을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면, 어머니는 본인이 자녀의 앞길을 막았다는 자책감에 더욱 괴로워하게 되실 것이고, 님께서도 겉으로 표현은 안 하더라도 어머니 때문에, 아니 어머니를 돌보기보다 술 마시고 주정이나 하는 아버지를 더욱 미워하게 될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원망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본인을 더욱 미워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러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요.
최대한 어머니에게 자주 연락을 드리고 자주 찾아뵈면서, 새로운 직장에서 잘 적응하여 본인의 꿈을 이루어 가시기를 응원합니다. 어머니의 가장 큰 기쁨은 아마도 자식의 성공을 바라보는 것일 겁니다. 쉽지 않은 상황을 지혜롭게 극복하시기를 응원합니다.
전용관 연세대 교수(스포츠레저학)·<너희가 사랑을 아느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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