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5.07 19:25
수정 : 2012.05.07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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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수 심리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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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힘’은
피해자가 피해자 돕는 유일 재단
그 모습이 눈물겹게 아름답다
박동운이란 사람이 있다. 해방둥이인데 그의 인생은 전반부와 후반부가 전혀 다르다. 35살까지는 꿈 많은 청춘을 거친 평범한 가장이었으나, 나머지 절반은 감옥과 세상 밖에서 제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국가가 강제한 간첩으로 살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35살 이후 그의 삶의 시간들은 원래의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한 고통과 전쟁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1981년 안기부에 끌려갈 당시 그는 진도농협 계장이었고 5살, 3살 남매와 만삭의 아내가 있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60여일간의 모진 고문과 허위자백을 통해 어머니, 동생, 숙부 등 박동운의 가족은 졸지에 ‘진도가족간첩단’이 되었다. 박동운은 ‘진도간첩단사건’의 수괴로 낙인찍혀 18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그뿐인가. 박동운과 가족들은 석방 뒤에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노골적으로 간첩이란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았다. 그러니까 감옥 밖에서도 혹독한 수인생활이 이어진 셈이다.
4년간 징역살이를 한 그의 어머니는 죽음을 넘나들던 고문의 순간에도 끝까지 허위자백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함께 잡혀간 두 아들이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릴까봐 그랬다는 것이다. 박동운은 그 아픈 기억 때문에 교도소에 있는 18년 동안 결코 무릎 꿇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반성문을 쓰면 석방해 준다는 제안에 대한 박동운의 대답은 간결하고 힘있다. 무고한 사람에게 간첩죄를 씌운 국가가 내게 반성문을 써야지 왜 내가 반성문을 쓰는가.
고문으로 몸과 영혼이 만신창이가 되고 분노와 억울함으로 머리칼이 쭈뼛거리는 수십년 동안 그는 자기존엄에 대한 확신을 버리지 않았다. 조금의 과장도 없이 고백해 보자. 학력, 나이, 경력, 사상적 배경, 성별 등을 모두 고려해도 나는 아직 박동운만큼 인간의 품위가 흘러넘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고문과 국가폭력 같은 반인간적 문제에서는 시퍼런 비수 같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모든 이들과 교감할 때는 더없이 맑고 고요하다.
결국 그는 2년여 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고문으로 조작한 간첩사건이었다는 국가의 자백을 받아낸 것이다. 하지만 이제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몸은 병들고, 나무뿌리 같던 장년의 시간들은 속절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시절을 돌이키는 박동운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에 바늘이 무수히 찔리는 느낌이다.
박동운은 그 아린 시절의 대가로 지급된 보상금의 일부를 고문과 국가폭력 피해자를 돕는 일에 내놓았다. 재단법인 ‘진실의 힘’은 그런 ‘박동운들’에 의해서 탄생했다. 재심 재판을 통해 무죄가 밝혀진 조작간첩사건 피해자들이 손해배상금의 일부를 출연하여 만든 재단, 그게 바로 ‘진실의 힘’이다. 피해자가 피해자를 돕기 위해 만든 세계 유일의 재단이다.
‘진실의 힘’을 다르게 표현하면, 내 고통과 상처를 발효시켜 반인간적 폭력에 희생된 이들을 보호하고 어루만지는 ‘상처받은 치유자’들의 집단이다. 한평생 끔찍한 고통과 사회적 소외와 고난 속에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이 헛되지 않도록 상처받은 치유자로 나서는 이들의 모습은 눈물겹게 아름답다.
올해 6월26일 유엔이 정한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엔 고문과 국가폭력 피해자, 그 치유와 재발 방지에 헌신해온 개인 또는 단체에 ‘제2회 진실의 힘 인권상’이 수여된다. 상처받은 치유자들의 간절함과 우뚝한 용기가 담긴 국내 유일의 인권상이다.
상처받은 치유자들에 의해 국가폭력에 의한 죽음 같은 고통과 덧난 상처들이 어루만져질 때 비로소 국가라는 거대한 공동체가 한발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명수 심리기획자, 트위터 @mepr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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