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10.14 18:39 수정 : 2013.12.16 16:04

이명수 심리기획자

신문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벙싯했다. 요즘 그런 뉴스를 접한 기억이 거의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서울행정법원이 내린 한 판결에 관한 기사다. 난민 신청을 한 미얀마인이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를 상대로 자신에 대한 강제퇴거명령을 취소하라는 소송을 했는데 이겼다는 내용이다.

한국의 난민 보호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로 지난 20년간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는 신청자의 6%에 불과하다. 심사 기간도 몇년씩 걸린다. 그동안 난민 신청자들에 대한 생계지원은 전무하다. 그럼에도 취업을 하면 불법이다. 난민 신청자 중 절반 이상이 돈이 없어 식사를 거른 적이 있다고 했다. 단속 위험을 무릅쓰고 돈을 벌 수밖에 없다. 그러면 법무부는 기다렸다는 듯 불법 취업 명목으로 잡아들여 추방한다.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은 그런 짐승 같은 행정 관행의 뒷덜미를 낚아채 주저앉힌 느낌이다. 오랜만에 법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되는 현장을 목격한 듯하다.

난민 신청자에게 제한없이 취업 활동을 허가할 경우 난민 신청이 남용될 우려가 있다는 정부 쪽 입장에 대해 판결문은 통렬하고 인간적인 언어로 답한다. 남용의 원인은 행정 지체 상황에 있으므로 제도를 보완해 난민 신청의 남용을 막아야지 난민 신청자를 난민 인정 때까지 난민이 아닌 것으로 추정해 생계지원도 하지 않고 취업도 할 수 없게 하는 것은 문명국가의 헌법정신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했다는 표현도 등장한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란 문장은 문학적 위엄까지 갖추고 있다. 문신처럼 가슴에 새기고 싶을 정도다.

그 정도로 행정의 획일성과 편의성을 내세우는 행정주체들의 횡포에 시달리면서도 그 불쾌한 느낌을 어쩌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었다. 이 나라에서는 법과 제도가 늘 사람보다 우선했다. 애초 사람을 배려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들이 외려 사람을 옥죄고 무시하는 수단으로 작동한다. 주객이 전도된 행정편의주의 사회다.

행정주체들은 근거가 없어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 근거는 대개 절차와 기록이다. 정작 그 혜택을 받아야 할 ‘사람’은 근거의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지금도 이른 편이지만 수십년 동안 교도소의 저녁식사 시간은 오후 4시 전후였다. 교도소 직원들의 퇴근시간과 재소자 점검의 편의를 위해서였다. 밥 먹는 사람에 대한 고려는 거기에 없다. 우리나라에선 소방관이 현장에서 다치면 벌점을 받는다. 4주 미만 부상 사고가 발생하면 훈계, 4주 이상이면 경징계, 3회 이상이면 파면이다. 안전수칙을 지키게 해서 사고를 줄이자는 취지야 좋다. 하지만 규정대로 방화복, 헬멧, 안전화, 방화두건, 인명구조 경보기 등을 착용하지 않으면 벌점을 받기 때문에 다급한 상황에서 생명을 구하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으면 말이 되나. 안 되는데 행정편의주의는 그런 끔찍한 코미디 같은 상황을 사람에게 강요한다. 그것도 상시적으로.

행정 집행자들은 특수한 사례를 허용하면 남용이 될 수 있다며 짐짓 경계의 태도를 취한다. 아무리 양식이 풍족해도 근거가 없다면, 눈앞에서 굶어 죽어가는 이가 있어도 그것을 측은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짐승의 괴성이라면 그럴듯하고 인간의 말이라면 헛소리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판결은 단순히 난민 행정의 부조리를 질타한 것 이상으로 느껴진다. 사람이 중심이 되고 제도가 그에 따라야 하는 당연한 진리를 곱씹게 해준다. 서울행정법원 심준보 판사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 판례가 행정주체들에게 사람이 중심이 되는 착한 근거의 시발점이 되길 바란다. 꼭.

이명수 심리기획자, 트위터 @meprism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이명수의 사람그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