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06 18:43
수정 : 2014.01.06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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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수 심리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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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인 공권력 집행을 비판하는 칼럼을 썼더니 명예훼손죄로 경찰이 고소를 해서 1년 가까이 재판 중이다.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지만 나름 잘 버틴다. 하지만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은 최종 판관인 판사에게 최대한 공손하게 무죄증명을 해야 한다는 현실이다.
첫 재판이 있던 날, 오래전부터 하고 있는 귀걸이를 뗄까 말까 망설이던 기억은 얼마나 부끄러운지. 재판정에 설 때마다 판사를 보며 ‘저이가 무엇이관데 나를 재단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의 한편으로 어떻게든 선량해 보이고 싶어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나를 느끼며 무참하다. 그런 일이 나는 그렇게 자존심이 상한다. 누구는 무겁지 않은 형량을 두고 다투는 일이라 한가하게 투정한다 했고 또 누구는 법치주의의 원리를 모르는 데서 오는 무식의 소치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겠나, 내 마음이 그런 걸.
시내 한복판에서 촛불집회에 참가하고 있을 때 ‘혹시 대통령 한 사람을 압박하고 설득하기 위해 이러고 있는 거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면 그 자리에 있는 내가 말할 수 없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혹은 경찰의 방패 맨 앞에서 촛불을 들고 서 있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감동과 결기의 표상으로 전파하는 어른들을 볼 때도 심란하다. 작금의 무자비한 공권력 집행을 고려할 때 폭력적인 진압이 시작되면 아이는 엄청난 내상을 입는다. 오래 고통받게 된다. 그래서 나는 무리 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그런 경우 마음은 그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박근혜 정권의 많은 행태에 동의하지 않는다. 단순히 이 정권에 반대해서가 아니다.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의 파업행위를 적군을 섬멸하듯 몰아치는 공권력은 끔찍하며, 정권에 비판적이란 이유만으로 종북 딱지를 남발하는 이념 사냥은 시대착오적이다. 대통령의 원칙만 원칙이고 다른 사람의 원칙은 불필요한 것으로 규정하는 오만과 독선엔 부아가 치민다.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지시는 죄수를 관리하는 교도소장도 해서는 안 되는 얘기다.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한다는 그 자체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현실인식과는 별개로 지금이 유신시대보다 더하다거나 역대 최악의 정권이라는 비분강개에도 동의하긴 어렵다. 당대의 현실인식은 늘 ‘올해 감기가 최고로 독하다’는 식이어서 체감지수가 부풀려진다. 내 기억엔 더 악랄하고 절망적인 시대가 많다. 어느 자리에서 그런 중립적인 마음의 일단을 드러냈더니 누군가 농반진반으로 내게 대통령 욕을 해보라고 했다. 그냥 웃었다.
총파업 현장에 참여한 어떤 시민은 깃발과 구호가 어색할 수도 있고 열사의 명령을 따르라는 선동이 불편할 수도 있다. 그 불편한 속마음을 표현한다고 눈흘김 당할 이유는 없다. 적진 앞에서 분열하면 안 된다는 새마을운동 깃발 같은 일사불란한 명제 앞에 언제까지 속마음을 저당잡히고 살 수는 없다. 나는 ‘모두 함께’보다 ‘따로 함께’란 말이 더 마음에 스민다. 그렇게 살기를 바라고 있다.
한 시인이 환승역 계단에서 팔다리가 뒤틀린 앉은뱅이 엄마와 등에 업힌 아기를 보았다. 그런데 어느 늦은 밤 여자가 먼지를 툭툭 털며 일어나 아기에게 집에 가자고 혼잣말하는 걸 목격했단다. 그 순간 시인은 배신감보다 다행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 토로한다. 들으며 울었다. 나도 같은 심정이다. 그런 고백 앞에서 섣부른 동정심을 탓하거나 빈곤을 구조적으로 개선할 방안 따위를 먼저 떠올리지 않는다고 힐난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사는 일이란 때로 ‘그게 다가 아닐 수도 있다’는 지점에서 출발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명수 심리기획자, 트위터 @mepr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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