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1.04.01 19:35 수정 : 2011.05.25 15:52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처럼 성격이 모호한 헌법기관도 드물다. 도대체 어떤 권한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는지 국민의 뇌리에 선명치 않다. 그렇기에 어떤 자격을 갖춘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야 하는지 상식적인 기준도 없다.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다. 헌법은 대통령과 관련하여 20개 조문(66~85조)을 두고 있다. 반면 국무총리에게는 단 1개의 조문을 할애한다. “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한다.”(86조) 덧붙여서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87조)라는 보충 규정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역대 어느 총리도 자신의 소신에 따라 장관을 제청한 예가 없다시피 하니 죽은 규정이나 마찬가지다.

헌법 문면이 상징이나 하듯이 총리의 비중은 대통령의 2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역대 총리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총리의 권한은 단 하나, 수틀리면 사표를 던질 권한뿐이다. 그나마 배포가 큰 총리라야만 가능한 일이다. 대통령의 허락 없는 사표는 항명이요 반란이다. 드물게 사표를 통해 항의하고 정치적 승부를 걸 수도 있다. 그러나 성공한 예는 거의 없다. 마치 우는 아이 사탕 주어 달래듯이 애로사항을 한두 건 들어주는 척하다, 잠잠해지면 이내 팽개치고 마는 것이 절대권력자의 근본속성이다.

수많은 역대 총리들 중에 퇴임 뒤에도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 있는 분은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 정도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총리는 대통령의 국정 파트너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종복일 뿐이다. 대통령과 국정을 ‘협의’하기 위해 청와대를 방문할 때도 가슴에 이름표를 달아야만 하는 게 총리였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허울 좋은 관직의 실상이다. 행여 요즘은 달라졌는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근래 들어 총리를 만나는 대통령의 모습을 언론에서 본 기억이 없으니 말이다.

도대체 국무총리는 어떤 일을 하는가? 1970년대 한 헌법교과서는 ‘대통령의 방탄조끼’라고 썼다. 군사독재의 외형을 다소나마 중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시위의 진원지인 대학에서 뽑아 쓰기도 했다. 그리하여 ‘인품과 학식을 겸비한’ 대학 인사는 더욱 거센 항의의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성난 학생들의 밀가루 세례를 받은 재상도 있다. 총리 정도로는 제대로 방탄이 되지 않았다. 대통령의 선거공약 사항이었던 동남권 신공항 선정 작업을 백지로 발표하는 현직 총리의 모습도 옹색하기 짝이 없다. 역대 총리의 평균 재임기간이 1년 남짓하니 제대로 일할 시간도 없다. “국무총리까지 지낸 사람을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대는 것은 일회용 반창고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회창 대표의 지적이 본질을 꿰뚫고 있다.

국무총리는 관료인가, 정치인인가. 차이에 따라 기대와 대우가 다르다. 정운찬 전 총리가 힘든 날을 보내고 있다.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정치를 꿈꾸기 때문이다. 정치의 세계는 잔인하고도 비정하다.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 관료는 기존의 조직을 다스리면 그만이지만 정치는 스스로 만들어내야만 한다. 자기방어뿐만 아니라 정적을 공격하는 법도 알아야 한다. 한 여당 중진의 말마따나 꽃가마는 남이 태워주는 게 아니다. 관료에게는 정직과 청렴이 절대 미덕이지만, 정치인에게는 오히려 한계점이 될 수도 있다. 곰팡이가 잘못 썩으면 부패한 불량식품이 되지만 잘 썩으면 맛도 영양가도 높은 발효식품이 된다. 스캔들은 관료를 죽이지만, 정치인을 더욱 키울 수도 있다. 국무총리, 관료인가, 정치인인가? 우리 시대의 애매모호한 부호(符號)다. 그 모호함의 이면에 한국 정치와 헌법질서의 불안과 비극의 씨앗이 잉태되어 있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안경환 칼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