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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4.29 20:00 수정 : 2011.05.25 15:52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 고등법원 판사가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일탈행위를 저질렀다. 현장에서 경찰에 적발되었고 즉시 법복을 벗었다. 놀라운 일이기도, 아니기도 하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판사가 그런 짓을!’이라는 것이 전형적인 반응이다. 그런가 하면 판사도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더 상식적인 정서도 있다. 다만 판사이기 때문에 변명의 입지가 매우 취약하다.

판사의 지하철 추행사건은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 일본에서도 더러 있는 일이다. 도쿄의 지하철은 서울보다 더욱 혼잡하다. 되풀이되는 판사의 품위 추락 사건에, 접촉 부위와 강도에 따라 상세한 징계기준을 마련했다고 한다. 남녀 다중의 육신이 엉겅퀴처럼 엮인 상황에서는 민감한 신체부위의 접촉도 피할 수 없다. 젊은 사내의 육체는 때때로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다. 그러나 피해자는 안다. 그게 불가피한 접촉인지, 의도적인 추행인지를.

이내 잠잠해진 이 사건을 새삼 거론하는 이유가 있다. 우리 시대의 법률가, 불완전하고 불안한 한 인간의 일상적 단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국민이 ‘사법고시’ 신화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다. 판검사만 되면 누구나 세상을 호령하고, 변호사라면 누구나 기사 딸린 승용차 뒷자리에 앉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기를 쓰고 자식을 법률가로 만들고 싶어한다. 사법시험만 합격하면 ‘열쇠’ 몇 개를 들고 시집올 처녀가 줄설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이 모든 신화가 시쳇말로 흘러간 옛 노랫가락이다. 이제는 ‘마담뚜’가 벌인 난전에서 성행하던, 여자가 남자를 사는 선진형(?) 인신매매도 거의 사라졌다. 그래도 이런 엄연한 현실에 감감한 사람은 판검사가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는 사실조차도 낯설어한다.

오래전에 우리 사회에서 소수정예 법률가 시대는 막을 내렸다. 해마다 1000여명의 변호사가 양산된다. 근자에 법학전문대학원생과 사법연수원생들이 집단행동에 나섰다. 이들의 시위를 턱없는 선민의식의 발로이거나 ‘밥그릇 싸움’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젊은이들을 누르는 현실이 너무나 각박하다.

지난해 변호사협회장 선거에서 신규 변호사의 수를 축소하겠다는 노골적인 공약이 난무했다. 당선된 협회장은 ‘준법감시인’ 제도를 도입하여 변호사의 일자리를 늘리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속내야 어쨌든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걸었는데 이제는 그런 포장조차 벗어던졌다. ‘공익’ ‘인권’ ‘정의’, 한때 그처럼 상용하던 거룩한 어휘들은 어느 틈엔가 한갓 수사(修辭)의 가치조차 상실했다.

이제야 비로소 법률가들도 솔직해진 것일까? 그게 아니다. 한줌의 여유도 없는 총체적인 위기의식 때문일 것이다. 모든 직업이 그러하듯이 법률가도 천차만별이다. 사람에 따라 버는 돈의 액수도, 하는 일의 무게도 다양하기 짝이 없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타인의 불행에 자신의 생존과 영달이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불행한 사람은 그 불행 때문에 법률가를 찾는다. 행복한 사람도 행여나 닥쳐올 불행을 막기 위해 법률가를 찾는다. 타인의 불행에 관여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은 자기 스스로 행복하지 않으면 그 일을 오래 하기 어렵다. 법률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세부적인 실무지식보다 그 지식을 받쳐주는 건전한 정신세계이다. 그런데 세상은 점점 법률가에 대해 엄하다 못해 냉혹하기까지 하다. 이제는 이상적인 법률가의 전형이란 없다. ‘위대한 법률가’란 역사 속으로 망명한 지 오래다. 세상을 주물러대는 대형 로펌의 주인과 누적된 격무에 청춘의 꿈조차 앗겨버린, 일그러진 표정의 젊은이들이 있을 뿐이다.

‘사법개혁’을 위한 새 법이 제정될 전망이다. 작은 일도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는 새내기 법률가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개혁이 되기를 바란다.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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