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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9.22 19:23 수정 : 2011.09.22 19:23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세훈이 빠져나간 자리에 인재의 대홍수가 났다. 여야를 막론하고 너도나도 시장 후보가 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풍요 속의 빈곤이다. 정작 투표할 시민은 시큰둥했다. 오래전부터 거론되던 정치인들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새 안철수라는 엄청난 복병이 나타났다. 세상이 열광했다. 애초 ‘해프닝’ ‘바이러스’ ‘기현상’으로 치부하던 정당들은 바짝 긴장했다. 그게 아니라는 것, 시대가 달라졌다는 것을 절감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위력의 사나이는 떼 논 당상처럼 보이던 자리에 ‘친구’의 손을 끌어당겨 놓고 자신은 물러섰다. 아무런 조건도 없었다. 50퍼센트가 5퍼센트에게 내준 ‘아름다운 양보’라고 한다. 일찍이 정치세계에서는 유례없던 일이다. 그러니 그가 더 큰 자리를 넘본다는 추측이 공공연히 떠돌밖에.

지난 20년 동안 시민의 ‘희망을 제작’하던 변호사 박원순이 ‘시민후보’로 출마를 선언했다. 다른 성향의 시민을 업고 이석연도 나섰다. 두 참신한 법률가들에게 거는 기대가 예사롭지 않다. 이제 정당은 무용지물처럼 보인다. 심지어는 타파해야 할 구체제라고까지 극언하는 젊은 시민들도 있다.

그러나 선거란 그런 게 아니다. 제아무리 바람이 일어도 정당의 바탕 없이는 성공하기 어렵다. 설령 무소속으로 시장에 당선되더라도 효과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기 곤란하다. ‘시민사회’란 분명히 실체가 있다. 그러나 그 정체가 모호하다. 누가 어떤 시민을 대표하는지 중구난방이다. 게다가 시민사회의 장기는 문제를 ‘제기하는’ 데 있지 문제를 ‘푸는’ 제도적 능력과 지혜는 그 몫이 아니다.

헌법은 정당을 특별히 받들어 모신다. “정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정당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보조할 수 있다.”(8조 3항)

그렇다면 도대체 정당의 정체는 무엇인가? 헌법재판소는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책임 있는 정책이나 정치적 주장을 추진하고 공직선거의 후보자를 추천 또는 지지함으로써 국민의 정치적 의사 형성에 참여함을 목적으로 하는 자발적인 조직’이라고 공식 정의를 내렸다.(1991년 3월11일)

호오를 불문하고 정당정치는 결코 내팽개칠 수 없는 현대 민주헌정의 핵심 원리다. 양당정치가 확립된 미국은 헌법에 정당 조항이 없다. 헌법이 제정될 18세기 말 당시에는 정당이란 국민의 공익보다 자신들의 사익을 챙기는 ‘파당’에 불과하다는 통념이 지배했다. 그러니 국가가 육성하기는커녕 오히려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는 정당을 필수적인 존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민주공화국으로 환력을 넘긴 우리인데 아직도 정당의 파당적 성격이 불식되지 않고 있다. 정강과 정책보다는 사람과 지역을 기준으로 이합집산하기 일쑤다. 오죽하면 ‘친×연대’라는 괴이한 명칭이 버젓한 당명이 되기도 했을까. 선진 국제사회에 도저히 ‘설명할 방법이 없는’ 부끄러운 현실이다. 선거 때마다 새로운 정당이 우후죽순처럼 탄생했다가는 현수막이 내리기 무섭게 사라지곤 한다.

그래도 정당은 필수적인 존재다. 정쟁, 담합, 부패, 무능, 비효율로 얼룩진 기성의 정당정치에 강한 경종을 주어야 한다. 과감한 개혁을 주문하고 명령해야 한다. 그러나 아예 내다버릴 수는 없는 존재이다. 두 유력한 시민후보도 종국에는 정당정치의 틀 속으로 들어갈 것을 권고한다. 답답하고 혼탁한 그 협잡의 세계에 소슬한 청풍을 불어넣어 ‘책임 있는’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할 것을 기대한다.


10월26일, 왠지 날짜가 심상치 않다. 공교롭게도 우리 현대사에 특별한 날이 아닌가. 안중근, 김재규의 총성처럼 뭔가 중대한 전기가 마련될 것 같은 기대가 솟는다. 다만 선거에 나서는 모든 후보와 시민이 새삼 다짐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는 시장을 뽑는 것이지 장래의 대통령을 뽑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아무리 대한민국이 ‘서울공화국’이라지만 시장은 시장일 뿐이다. 애시당초 오늘의 이 사태가 어떻게 초래된 것인가. 마음은 시청을 떠나 청와대에 가 있었던 전직 시장의 가당찮은 야심 때문이 아니었던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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