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2.06 19:37
수정 : 2012.02.06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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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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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의 시계도 움직인다. 그러나 바깥세상보다 한참이나 더디게 움직인다.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사법의 이상이다. 그래서 때로는 답답하다. 법원도, 판사도 꽉 막혀 있는 것처럼 비친다.
‘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 해묵은 법관수칙이다. 그러나 판결문 속에 담을 수 없는 생생한 사연이 있다. 판결문은 법률용어와 형식에 의해 여과된 인간드라마다. 판사들 자신만 언행을 조심하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도 판결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래야만 판결이 공정하고 사법부의 권위가 유지된다고 믿는다.
대저 판사는 비판받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국민의 입장은 그렇지 않다. 국민은 엄연한 나라의 주인이고 판사는 공복에 불과하다. 주인이 머슴의 행동거지에 대해 잔소리 좀 한다고 누가 시비할 수 있으랴. 때로는 잔소리가 사실과 다르고 도가 지나쳐도 참고 분을 삭이는 것이 머슴 된 도리다.
재판을 받은 당사자는 더 말할 나위 없다. 형사피고인은 누구나 억울하기 마련이다. 죄 없는 사람은 실로 기가 막히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도 언제나 죄에 비해 벌이 무겁다고 느낀다. 민사재판은 승자와 패자가 나뉜다. 그러니 최소한 당사자 절반은 판결에 불만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신속하게 처리하면 졸속재판, 지나치게 신중하면 ‘미뤄 조지기’라며 비난한다. 이 모든 게 사법의 속성이요, 판사의 운명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법원은 불신과 비판의 표적이 된다. 재판이 한 건 잘못되면 법원 전체를 매도하는 것이 대중의 속성이다. 삶이 팍팍해질수록 분노할 명분과 대상을 찾기 십상이다. 법에 쓰린 경험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법률가 매도에 가세한다. 판사, 검사, 변호사 할 것 없이 모두 도둑놈들이라고.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대중에게 가장 인기 있는 구절이 ‘몰살 법률가’ 구호다.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법률가 놈들을 모두 때려죽이자!’(<헨리 6세 제2부> 4.2.78) 예술작품은 더욱더 그러하다.
개인의 사연을 통해 세상을 고발하는 것이 문학이요 영화다. 예술에는 허구와 창의적인 변용이 허용된다. 실화를 소재로 하더라도 엄정한 사실과 다를 수 있다. 근래에 들어와 법정영화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난해의 <도가니>에 이어 새해에는 <부러진 화살>이 극장가를 흔들고 있다. 전자는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문제를 제기했고, 이어서 인기 작가가 소설로 고발했다. 그래도 대중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는 달랐다. 가히 영상매체의 폭발적인 위력을 입증한다. 후자는 ‘석궁재판’을 다룬 영화로 당사자가 현직의 고위 법관이기에 더욱 세인의 주목을 받는다.
문제는 예술적 고발에 대처하는 법원의 태도다. 법원은 이례적으로 영화의 내용을 반박하는 상세한 재판 내용을 공개하면서 몽매한 대중의 계도에 나섰다. 현명하지 못한 처사였다. 오히려 역효과를 유발하는 부질없는 짓이다. 대중의 속성을 몰라도 한참이나 모른다. 세상은 활짝 열리고 있는데, 법원은 법정과 서류 속에 갇혀 있는 죄수인가. 플라톤의 ‘동굴의 우상’이 떠오른다. 해당 판사가 억울하면 당사자에게 대응을 맡기고 뒤에서 조력할 일이지 기관 전체가 나설 일은 아니었다. 그럴수록 대중은 한 사건에서 법원 전체를 의심한다.
세상이 엄청나게 바뀌고 있다. 일상이 자유롭고 언로가 활짝 열려 있다. 대통령도 “××짬뽕”으로 비하당해도 도리 없이 참고 지내야 하는 세상이다. 마침내 양승태 대법원장이 법조계의 자성을 촉구하고 나섰다. “국민이 재판 실상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 영화를 보고 어째서 재판의 전형이라 생각하는지 그 원인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수장다운 태도다. 그의 말대로 영국과 미국과 같은 사법선진국은 재판을 잘못 그린 영화가 많아도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깊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갇힌 세상에 사는 법관의 관점에서는 예술은 무책임하고 대중은 무식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게 열린 세상에서 예술작품이 세상의 문제를 제기하고 대중이 호응하는 방식임을 알아야 한다. 정작 계몽이 필요한 것은 법원이다.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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