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9.01 10:48
수정 : 2011.09.01 10:48
[ESC] 男과장 S의 오피스 메아리
선배들은 직장에서 후배들의 귀감이 되어야 한다? 언뜻 들으면 일리있는 말이지만, ‘국영수를 중심으로 교과서에 충실하면 서울대 갈 수 있다’는 말씀처럼 헛웃음만 나온다. 회사는 결국 일하는 ‘인간’들이 모인 곳이다. 자기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선배에게 은혜를 갚으려 하고, 괴롭히는 이에게는 술자리 뒷담화로라도 앙갚음을 한다. 회사라는 ‘조직’에서 사람들이 따르고 싶어 하는 ‘두목’이 되려면 3가지 역할에 충실하면 된다.
첫째는 ‘방탄조끼’다. 본인보다 높은 사람의 폭풍 갈굼에 흔들리지 않고, 이성과 냉정으로 필터링한 뒤 후배에게 지적사항을 일러준다. 예전에 모시던 임원은 담배 안 끊는다고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내면서도, 다른 부서에서 성과 부진의 핑계를 나의 협조 부족으로 돌리자 진위를 파악하고 방탄조끼가 되어줬다. 상대는 회사의 실세였던 영업부문 전무였기에 내 두목도 내상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로 난 그분께 누 끼치지 않으려고 정신 바짝 차려 일했다. 보통의 두목들은 잘돼서 칭찬받을 일엔 슬며시 숟가락을 얹고, 골치 아프게 돌아가는 일에는 가차없이 발을 뺀다. 본인 욕먹으면 덕지덕지 할증 붙여 살풀이해대는 꼰대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아는 팀장 하나. 일은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고(아마 그럴 깜냥이 안 되는 듯하다), 안되면 아랫사람 책임이다. 한번은 임원에게 뭉그적대며 일한다고 지적을 받자, 점심시간에 밥을 빨리 먹는 것(눈치보며 서둘러 밥 먹게 한단다!)만으로도 후배를 대역죄인으로 만들었다.
둘째 역할은 바로 ‘지갑’이다. 부하 직원을 혼낼 때 혼내더라도 가끔 소주 한잔을 사먹이는 덕을 가리킨다. 이때 효과를 높이려면 가급적 법인카드가 아니라 본인 지갑을 열어야 한다. 그 감동은 지불한 액수에 비례하지는 않기 때문에 무리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런 추억을 공유한 부하는 스스로를 ‘두목이 지갑을 열 만큼 소중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자신감과 업무에 대한 성취동기를 높여간다. 가끔 꼼장어에 소주를 사주던 선배가 있었다. 본인도 고생이 많았지만 술잔에 애정을 담아 후배들을 다독였다. 언젠가 우리가 회사를 바꿔보자며…. 제 지갑은 강산이 변해도 안 열면서, 출장 가는 후배에게 선물 사오라고 압박 주는 ‘기생수’도, 물론 있다.
셋째 역할은 ‘형’이다. 14살 중딩이나 25살 예비역 복학생이나 조직사회에 대한 고민은 차고 넘친다. 고민을 들어주고 입장을 이해해주려는 시도만으로 후배들은 감동한다. 신입사원 시절 피로와 주눅에 찌들었을 무렵이었다. 회식 자리에서 사수였던 대리가 말을 건넨다. “힘들지? 난 너보다 사고 많이 쳤어. 너무 걱정하지 마. 금방 좋아진다.” 주옥같은 명언이나 현명한 처세술을 들은 것도 아닌데, 의기소침했던 마음에 훈훈한 기운이 흘렀다. 그 순간부터 사수가 상사에서 형으로 가까워졌다.
직장에 대한 신념이 아무리 투철하더라도, 1년에 한번 정도는 너그럽게 다가가자. ‘형만 믿어봐!’라며 허세도 좀 부려보자. 너무 맑은 물엔 고기가 살지 못한다.
□□기업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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