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4.04 17:10
수정 : 2012.04.04 17:10
[매거진 esc] 女과장 S의 오피스 메아리
친구 중에 가장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해, 가장 먼저 은퇴(?)한 친구가 있다. 20대 초반 에 회사에 취직해 맥주를 사주던 친구는, 이른 나이에 경험한 조직의 부조리에 몸부림쳤다. 부당함에 대항하다 잘리기도 하고, 자기가 못 견뎌 사표 던지기를 몇 번. 어느 날 돌연 공식적인 조직생활에서 은퇴, 한 달에 100만원만 버는 생산활동에 돌입한 친구다.
이 친구의 은퇴식이 갑자기 기억난다. 마지막 사표를 던지고 온 날 우리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모였다. 말이 위로였지, 대부분의 친구들은 왜 참지 못했냐는 타박성 멘트가 대부분이었다. 조용히 듣고 있던 그가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그의 사무실 책상에 붙여놓았다던,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의 <굿 워크>란 책에서 발췌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아무 의미도 없는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고 싶지 않다. 나는 기계와 관료제의 노예가 되어 권태롭고 추악하게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바보나 로봇, 통근자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누군가의 일부분으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일을 하고 싶다. 나는 좀더 소박하게 살고 싶다. 나는 가면이 아니라 진짜 인간을 상대하고 싶다. 내겐 사람, 자연, 아름답고 전일적인 세상이 중요하다. 나는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에게 나는 ‘미쳤다’고 했다. 그러고 싶으면, 은행에서 돈 1억 빌려서 치킨집을 차리라고. 은행 이자에 불안해하고, 술 먹고 행패 부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아마 진짜 인간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나는 알았다. 그가 원하는 게 뭐였는지. 최소한 그 순간에는 이해가 됐다.
오늘도 박 부장의 잔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오지랖 이 과장의 참견도 변하지 않겠지만, 나는 아무 의미 없는 경쟁 속에 있지 않다. 나는 권태롭지 않다. 나는 누군가의 일부분이 아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나와 내 가족과 회사와 내가 속한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대한민국 직장인일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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