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7.28 14:21
수정 : 2011.07.28 14:21
[매거진 esc] 이경섭의 자동차 공인중개소
현실로 성큼 다가온 오픈카, 문제는 지갑 아닌 가치에 있는지도…
절벽이나 사다리처럼 높은 데서 떨어지는 꿈을 꾸고 나면 종일 찜찜했다. 어른들은 키가 자라기 때문이라 하셨지만 성장이 멈췄음에 분명한 나이에 이런 꿈을 꾸는 건 또 무슨 조환지. 고소공포증이 있어 전망 엘리베이터 같은 건 어지간하면 타지 않는다. 놀이기구도 마찬가지. 세상에 저걸 돈 주고 타다니. 언젠가 멋모르고 바이킹을 탔다가 진짜로 죽을 뻔했다. 후배 녀석이 “맨 뒷자리에 타면 괜찮아요”라며 꼬드겨 눈 딱 감고 탔다가 어찌나 비명을 질렀던지. 놀란 아저씨가 일찍 바이킹을 세우는 바람에 같이 탔던 사람들이 흘겨보던 기억도 난다. 그러니 번지점프 따위를 하는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거다. 이건 앞으로도 절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오픈카를 타는 사람들. 오픈카는 지붕을 훌렁 벗기고 타야 하는데 그러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적으로 받는다. 일단 이게 부담스럽다. 게다가 땡볕 내리쬐는 도심에서 버스 꽁무니 매연을 맡으며 신호등에 걸려 우두커니 서 있는 오픈카 운전자를 보면 괜히 측은하기까지 했다. “에그, 폼 한번 잡으려고 참 고생이 많다” 싶어서. 이러니 내가 오픈카를 살 일이란 애당초 그른 일 아닌가.(오픈카는 정확한 용어라기보다 편의상 쓰는 말이라 컨버터블, 카브리올레, 스파이더, 로드스터 등으로 표기하는 게 옳지만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니까 넘어갑시다.)
찬 바람과 따뜻한 바람의 완벽한 이중생활
오픈카를 처음 운전해본 건 15년 전쯤 스웨덴에서였다. 북유럽 스칸디나비아에서 오픈카 드라이빙이라니 말만으로도 근사하지 않은가. 실로 근사했다. 울창한 침엽수림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삼림 도로. 청명한 공기와 맑은 호수들. 싸늘한 시월의 공기를 한껏 마시며, 그래 오픈카는 이런 곳에서나 타야지 싶었다.
그게 사브였다. 지금은 국내 판매도 중단됐고 브랜드 존재감조차 희미해진 사브는 그래도 한때 국내에서 가장 잘나가는 수입차 브랜드였다. 빨간색 4인승 사브 900시리즈 컨버터블은 오픈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였을 만큼 인기를 끌었다. 인기를 끌었다는 것이 곧 판매가 무진장 잘됐단 뜻은 아니다. 그저 이미지가 그랬다는 거고 오픈카는 여전히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 같은 것이었고 지붕 벗겨지는 차란 먼 동경의 대상으로 남았다, 오랫동안.
수입차 시장이 점차 커지면서 오픈카는 영화 속 장면이 아닌 현실의 차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수입차 브랜드는 어김없이 오픈카 모델을 국내에 선보였다. 어차피 판매량이 많지 않은 차종이긴 하지만 당장 수익성보다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스포츠카와 오픈카였기 때문이다.(이런 점에서 보면 요즘 잘나가는 현대자동차가 왜 오픈카를 만들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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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카의 매력은 무엇일까? 당연히 지붕이 벗겨지는 것에 있다. 여닫을 수 있는 지붕을 장착한 것으로 완벽히 이중생활을 즐길 수 있는 자동차가 되는 것이다. 창문을 모조리 연다 해도 승용차는 어디까지나 실내와 바깥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오픈카는 지붕을 벗기는 순간 바람과 햇볕과 풍경을 그대로 차 안에 온전히 품을 수 있는 딴 세상 차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낭만적이기로 따지자면 머리칼(또는 스카프)을 휘날리며 세상 끝으로 달려가는 오픈카를 따라잡을 만한 게 없다.
달리다 비라도 들이치면 지붕을 닫으면 되고(15초면 된다) 가랑비쯤이면 그냥 맞으며 달려도 좋을 것이다. 오픈카는 또 사계절용이다. 한겨울에 오픈카는 또 다른 낭만이 있다. 머리를 스치는 차가운 바람이 히터에서 나오는 따뜻한 바람과 차 안에서 뒤섞이며 묘한 쾌감을 선사한다. 메르세데스 벤츠는 아예 따뜻한 바람으로 운전자의 목덜미를 감싸는 히팅 기능을 추가해 ‘에어 스카프’라는 멋진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낭만을 결제할 준비가 됐다면 오픈카를!
이처럼 오픈카는 장점만으로 보면 누구든 사지 않을 도리가 없는 매력적인 차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국내에서 판매되는 오픈카는(전부 외제차다) 20종 안팎.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중형 오픈카는 ‘크라이슬러 세브링 컨버터블’.(사진 아래·4090만원) 가장 만만한 모델은 앙증맞은 2인승 차량인 ‘스마트 포투 카브리오’(사진 위·2790만원)가 있다. 하지만 판매 대수로 따지면 미미하기 그지없다. 이유는 뭘까. 비싸서? 아니다. 오픈카를 타려면 돈보다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픈카는 실용적인 면에서 낙제점을 면치 못한다. 비싸고 짐 실을 공간도 부족하고(심지어 배낭 하나 넣을 곳이 없는 차도 있다) 사람도 여럿 태울 수 없다.(어떤 차는 2+2 방식이라 해서 겨우 강아지나 태울 뒷자리를 시트라고 생색을 낸다.) 그러니 나처럼 부끄러움이 많은 것도 문제지만(물론 돈도 문제긴 하다) 차를 딱 한 대만 타는 사람에게 오픈카는 그리 만만한 선택이 될 수 없다. 용기가 필요한 이유다.
오픈카는 여유로운 이들의 세컨드카이거나 일부 마니아들의 호사스러운 전유물인지도 모른다. 실용성과는 거리가 먼 사치품.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인생은 모조리 실용으로만 이뤄져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우리 삶에는 따지자면 굳이 없어도 될, 반드시 그것이 아니어도 될 것들이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삶을 풍요롭게 하는 존재들이 있다.
내가 아는 분은 최근 ‘각그랜저’라 불리는 원조 그랜저 한 대 구하셨다. 값이라야 300만원 남짓. 중고 경차 값도 되지 않는 돈으로 그분은 추억과 낭만을 사셨다. 이렇게 보면 낭만과 호사란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차피 누구나 자기가 가치 있다고 믿는 것에 돈을 지급하는 거니까.
삶 자체를 완전히 바꾸진 못해도 살다 보면 기분을 환기시키는 것들이 있다. 오픈카도 물론 그중 하나다. 하지만 꼭 오픈카를 사지 않아도 그런 존재를 일상에서 찾아볼 수는 있다. 이를테면 아침에 향수를 뿌려본다거나 샤워 젤을 새로 바꿔본다거나 하는 것들. 신선함이란 익숙한 것으로부터 살짝 벗어나면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가장 좋은 건 스포츠실용차(SUV) 따위는 당장 팔아버리고 오픈카를 한 대 사는 것이겠지만.
월간 <모터트렌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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