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1.03 11:17
수정 : 2011.11.03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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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벤츠 E350 카브리올레. 메르세데스-벤츠 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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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이경섭의 자동차 공인중개소
‘인생 최고의 날’ 새까만 장례 의전차…도대체 왜 타는 거니
가을이 깊다. 가을바람이 불면 지갑에도 찬바람이 분다. 바야흐로 경조사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시집가고 장가들기에도 좋은 때지만 죽기에도 좋은 나날인가 싶다, 가을은. 지난 주말에도 장례식장 한 군데와 결혼식장 두 군데를 다녀왔다. 얇아진 지갑을 주머니에 꽂고 올림픽대로를 타고 집으로 오는데 길이 밀린다. 밀리는 길 사이에 언뜻언뜻 눈에 띄는 꽃장식들. 웨딩카다. 인터넷 포털에 올라온 신어사전에 의하면 웨딩카는 ‘갓 결혼한 부부를 태운 자동차’를 말한단다. 그러니 지극히 낭만적인 자동차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낭만과는 거리가 먼 요상한 웨딩카가 자꾸 눈에 띈다. 지난 주말 올림픽대로에서 목격한 웨딩카 석 대를 소개할까? 한 대는 메르세데스 벤츠 S500이었다. 웨딩카로 쓰기에 최고의 차가 아닐 수 없다. 비싸고 폼 나는 차라는 뜻이다. 문제는 색깔이 ‘검다’는 데 있었다. 검은 웨딩카. 과연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는가? 그 차가 아무리 당대 최고의 세단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벤츠 S500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신랑 친구 가운데 유일하게 차를 가진 친구의 차가 벤츠 S500이었을 수도 있다. 그 차가 하필 검은색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검은색’을 굳이 의전용으로 쓰려면 결혼식보다는 장례식에 더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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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규어 올 뉴 XJ 5.0SC LWB. 재규어랜드로버 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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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하얗거나 노랗고, 붉거나 푸른색 자동차도 장례식 의전차로 쓰기에 마땅하지 않다. 물론 노랗고 귀여운 자동차에 검은 리본을 묶어 장의차를 앞서 달리는 경건한 선도차로 쓴다 해도 안 될 건 없다. 그래도 경찰이 출동하거나 범죄자 취급을 당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세상엔 어울리는 게 있고 그렇지 않은 게 있는 법이다. 게다가 어울리고 말고를 떠나 ‘사회 통념’에 맞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이건 예의의 문제일 수도 있다.
검은 벤츠·에쿠스에 꽃분홍 장식들, 언밸런스의 극치
두번째 웨딩카는 현대 에쿠스였다. 안타깝게도 이 차 역시 검은색이었다. 관대하게 상상해보건대 에쿠스는 신랑 아버지가 소유한 차일 수도 있다. 인자하신 시아버지가 믿음직한 운전기사를 시켜 신혼여행을 떠나는 새아기의 편의를 위해 베푸신 극진한 배려일 수 있다.
그러나 기왕이면 분홍 꽃장식과 풍선들은 좀 삼갔더라면 어떨까 싶다. 굳이 “이 차엔 신혼부부가 타고 있어요”라고 동네방네 소리치고 싶은 걸까? 그러기엔 꽃장식 붙인 검은 에쿠스의 위용이 심히 민망하다. 심지어 그 차에는 ‘오늘밤이 과연 첫날밤일까요?’라는 계면쩍은 문구마저 뒷유리에 떡하니 붙어 있었다. 차를 빌려준 시아버지가 보시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원.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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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카 꽃장식을 단 재규어 올 뉴 XJ. 재규어랜드로버 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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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목격한 웨딩카는 기아 K5였다. 푸른빛 도는 은색이었는데 검은색보단 한결 낫지만 이 역시 최적의 선택은 아니다. 웨딩카로서 최고의 선택은 역시 흰색이다. 어떤 근거에서? 글쎄, 웨딩카는 어떤 색이어야 한다고 딱히 정해진 건 없다. 왜 흰색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굳이 원하신다면 신부의 웨딩드레스가 흰색인 이유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순결하고 깨끗해 보인다는 따위의 너절한 덧붙임은 없어도 좋을 듯싶다. 무조건, 웨딩카는 무조건 흰색이어야 한다.
그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웨딩카는 어떠했는가? 물론 당연히 흰색이었다. 세월이 흘러 수정혼식(水晶婚式, 결혼 몇 주년인지 맞혀보라!)을 지났지만 내 웨딩카의 행색은 또렷이 기억한다. 뽑은 지 일주일도 안 된 현대 엑센트. 흰색 소형차. 이 차에 친구들이 붙여준 풍선과 깡통을 매달고 거리를 내달렸다. 요즘 소형 국산차를 웨딩카로 쓸 젊은이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시절, 가난한 내 친구들에게 차라곤 딱 한 대, 부잣집 아들이 소유한 엑센트가 유일했으니. 그나마 검은색이 아니었던 게 천만다행이었달까. 이리하여 결혼 15주년이 지난 지금 나는 “웨딩카는 흰색이 최고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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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벤츠E350 카브리올레-재규어 올 뉴 XJ 5.0SC LWB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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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출발에 어떤 차인들 어떻겠느냐만 이왕이면 다홍치마
인터넷에서 본 가장 기함할 웨딩카는 분뇨수거차였다. 실제 웨딩카로 썼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트럭도 아니고 분뇨차에 꽃장식을 붙여 새색시를 태우다니 이건 너무하다 싶었다. 그런데 또 한번 관대하게 생각해보면 그렇다. 큰 차든 작은 차든 무슨 상관일까.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을 빙자해 말해본다면 검은색이거나 흰색이거나 안전하게 공항까지 잘 데려다주기만 하면 ‘장땡’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지나가는 검은 웨딩카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던 내 손가락이 부끄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영화 <졸업>의 마지막은 이랬던 걸로 기억한다. 더스틴 호프먼이 결혼식을 올리고 있는 연인을 납치해 결혼식장을 뛰쳐나와 마침 지나가던 버스에 올라타는 장면. 그 버스의 색깔은 노란색이었다. 그야말로 최고로 멋진 웨딩카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게다가 그것이 ‘함께하는 첫출발’이라면 버스이든 포터 트럭이든 최고의 웨딩카라 부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단, 신혼부부 당사자에 한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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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섭의 자동차 공인중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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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기왕이면 ‘손색없는’ 웨딩카가 있었으면 좋겠다. 난 방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종류가 무슨 상관이냐”고 외쳤다. 하지만 만일 내가 지금 결혼한다면 결코 엑센트를 웨딩카로 쓰고 싶진 않다. 세상에 얼마나 멋진 차가 많고 많은데. 그래서 리스트를 뽑아놓고 고민해 봤다. ‘최고’라고 할 순 없겠지만 인생 최고의 날에는 벤츠 E350 카브리올레나 재규어 올 뉴 XJ 같은 차들이 웨딩카로 어울린다. 물론 웨딩카로 쓰려고 이 비싼 차들을 직접 구입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색깔만큼은 반드시 흰색으로 구하실 것.
이경섭 월간 <모터 트렌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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