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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3.26 18:57 수정 : 2011.06.07 10:59

고전 오디세이

고전 오디세이 ② 모방과 경쟁(imitatio et aemulatio)을 통한 고전의 부활





문화·학문 빈곤했던 정복자
그리스 탐닉하며 갈증 풀어
번역·주해로 ‘최초 르네상스’

‘고전의 부활’을 ‘르네상스’(renascens)라고 처음 외친 페트라르카(1304~1374)의 작은 편지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아! 갈기갈기 찢긴, 아! 상처투성이의 <수사학 교육>이 나(페트라르카)의 손에 도착했나이다. … ‘오! 시간이여, … 너는 어떤 것도 지켜주지 않는구나. 너는 제물을 바쳐야만 믿음을 주는구나.’ … 여기저기 풀어헤쳐졌지만, 당신의 아름다운 몸을 보았나이다.”<퀸틸리아누스에게 보내는 편지>

페트라르카가 그토록 보고자 했던 <수사학 교육>은 콘스탄츠 회의(1414~1418) 중에 발견된다. 이 회의는 요하네스 후스의 화형을 결정했고 교황 요한네스 22세의 퇴위와 마르티누스 5세 선출을 논의했던 중요한 자리였다. 이 회의에 문헌 사냥꾼인 포치오도 참석했다. 한데 그의 관심은 회의가 아닌 책에 있었다. 포치오는 주변의 여러 수도원을 방문하였다. 그중 하나가 장크트갈렌(Sankf Gallen) 수도원이었다. 세속의 책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던 수도사들은 책들을 곰팡이가 핀 마대에 담아 창고에 던져두었다. 이 먼지 더미에서 포치오는 <수사학 교육>을 찾아내는데, 이 발견을 알리는 포치오의 편지를 접한 브루니는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한다.

“자네가 찾아낸 책이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귀중한 보물임을 알아야 할 것이네.”

<수사학 교육>은 1470년 로마에서 처음으로 책으로 세상에 다시 태어났고, 학자들의 번역과 주해를 거쳐서 많은 작가들, 사상가들, 정치가들이 읽고 참조할 수 있는 고전으로 완전히 거듭난다. 르네상스 시대에 서양 고전은 이렇게 재발견되고 부활했다. 그러나 이 부활이 서양 역사에서 처음은 아니었다. 이 현상은 오히려 서양 고대 로마 시대에서 더 자주 발견된다. 이유는 무엇일까? 단적으로 라틴어가 가난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로마인의 탄식을 들어보자.

“그때 로마의 문화는 척박했다.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기에, 학문에 큰 힘을 쏟아부을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문법학자와 수사학자에 대해서> 제1장)


로마는 오랜 전쟁으로 인해 학문과 문화를 가꿀 여력이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인이 취한 방법은 그리스 고전의 번역이었다. 언어와 사유의 경쟁력에서 라틴어는 그리스어를 감당해내지 못했다. 호메로스 이후 수많은 시인·철학자·역사가들이 삶에 대한 반성과 세계에 대한 시각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내놓았다. 그리스어에 축적된 지혜는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로 로마인들은 번역과 주해를 통해서 그리스 고전을 직접 수용한다.

1세기 로마의 수사학자이자 교육자였던 퀸틸리아누스 동상. 퀸틸리아누스는 로마가 그리스 정신의 모방 단계를 지나 그리스를 극복했다고 주장했다.

고전의 번역이란 점에서 로마가 최초의 르네상스 시대일 것이다. 라틴어 최초의 문학 작품이 노예 출신인 안드로니쿠스가 라틴어로 번역한 <오디세이아>(기원전 272년 작품)라는 점에서 이런 사실은 쉽게 확인된다. 로마인들에게 사기와 기만의 대명사이자 혐오 인물이었던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의 이야기가 최초의 라틴 문학 작품이었고, 이 작품이 심지어 로마의 학교 교재로 사용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앎은 우선 학문의 경이로움으로 로마인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 앎은 지식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리스어가 전해준 새로운 앎은 로마라는 대도시에서 벌어지는 온갖 종류의 사건-사고를 해결하는 데 기초 사유로 작동하였다. 제국과 대도시를 운영해 본 경험이 없었던 로마인들은 이를 이미 경험한 그리스인에게서 배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까닭에 로마 지식인들의 그리스어 숭배는 대단했다. 이는 카이사르(기원전 100~44년)가 브루투스에게 칼을 맞는 순간에도 그리스어로 “아들아, 너도!”(kai su, teknon!, 수에토니우스 <황제열전> 아우구스투스편 제82장)라는 말을 하면서 죽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로마는 그리스를 모방하는 선에서 머무르지는 않았다. 세계의 지배자로 등극한 로마인의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정 기간의 모방 단계를 벗어나자, 로마인들은 서서히 그리스인들과 경쟁을 시도한다. 우화 작가인 파이드로스(서기 18~55년)의 경우를 살펴보자.

“나(파이드로스)는 그(아이소포스)가 남긴 작은 오솔길을 큰길로 만들었다. 이를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우화> 제3권 서문 38장)

인용에서 ‘오솔길’은 원래 아이소포스(이솝)가 노예이었기에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한 것을 뜻하고 ‘큰길’은 파이드로스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과 장치를 새로이 개발했다는 의미이다. 아이소포스의 이야기를 수용했지만, 단순 모방이 아니라 창조적 경쟁을 거쳐 이미 극복했다고 주장하는 셈인데, 아직 극복 단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어찌되었든 로마인들의 경쟁 노력은 계속되었고, 그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리스 작품 대신에 라틴 작품이 학교의 교재로 사용되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에피로타는 베르길리우스와 다른 신세대 시인들의 작품을 강의 주제로 삼은 최초의 교사였다.”(<문법학자와 수사학자에 대해서> 제18장)

“이제 라틴어는 가난하지 않다”
‘수사학 교육’ 등 교재 만들어
1세기초부턴 그리스어와 경쟁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 같은 당대의 라틴 작품을 드디어 강의 교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정신적으로 정복당한 로마가 이제 그리스 정신의 모방 단계를 지나 본격적으로 경쟁하는 단계에 들어섰음을 확인해 주는 사례다. 로마에서 이 현상이 관찰되는 시기는 대략 서기 1세기 초 무렵이다. 그런데 1세기 말이 되면, 로마인 가운데에 심지어 그리스를 극복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아예 대놓고 로마인이 그리스인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퀸틸리아누스의 주장을 들어보자.

“내가(퀸틸리아누스) 보기에, 키케로는 그리스인들의 모방하는 일(ad imitationem)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연설로 데모스테네스의 역동하는 힘과 플라톤의 깊이 있는 사유와 이소크라테스의 유쾌한 즐거움을 오롯이 새겨내었다.”(<수사학 교육> 제10권, 1장 108절)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단적으로 그리스인에게 호메로스가 있다면, 우리 로마인에게는 베르길리우스가 있다”(<수사학 교육> 제10권, 1장 85절)라는 주장에서 볼 수 있듯이, 로마인의 경쟁력에 대한 퀸틸리아누스의 믿음은 굳건하다. 아마도 이제 라틴어가 가난하지 않다는 자신감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퀸틸리아누스가 로마의 수사학자이자 교육자였음을 주목하자. 그의 고민은 어떻게 말을 잘하도록 교육하는가였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니었다. 교육자로서 그의 최대 관심은 ‘좋은 사람’(vir bonus)을 기르는 일이었다.

안재원/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길은 책읽기였다. 책읽기는 서양 교육 전통에서 그가 새롭게 도입한 교육 방법이었다. 책읽기가 처음부터 로마의 교육 방법은 아니었다. 우선 로마에는 라틴어로 된 읽을 책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좋은 사람을 기르기 위해서는 아무런 책이나 읽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의 고민은 “무엇을 읽혀야 하는지”(qui sint ledendi, <수사학 교육> 제10권, 1장 37절)였다. 이 고민은 교육을 위해 가치 있는 책들의 ‘서열’(ordo)을 매기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이 작업이 서양 고대에서 소위 삶의 모범과 규범이 되는 서양 고전 선정(Kanones)의 시작이다.

선정의 기준은 간단했다. 과연 어떤 책이 ‘좋은 인간’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는가였다. 이 ‘좋음’의 기준에 입각해 선정된 책들이 서양의 고전(classica)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제도로 자리잡게 된 고전 읽기는 서양 고대의 교육 제도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주도한다. 말하기 중심의 교육 전통에서 읽기 교육으로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안재원·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안재원 교수는 서울대 고전학 협동과정 석사(‘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나타난 호메로스의 수용과 변용 연구’) 학위를 받은 뒤 독일 괴팅겐대학 서양고전문헌학과에서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의 수사학자인 ‘알렉산더 누메니유의 단어-의미 문채론’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있으며, 키케로의 <수사학>을 옮겼으며 <키케로의 인문학에 대하여> 등 다수의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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