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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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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오디세이 ② 모방과 경쟁(imitatio et aemulatio)을 통한 고전의 부활
문화·학문 빈곤했던 정복자
그리스 탐닉하며 갈증 풀어
번역·주해로 ‘최초 르네상스’ ‘고전의 부활’을 ‘르네상스’(renascens)라고 처음 외친 페트라르카(1304~1374)의 작은 편지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아! 갈기갈기 찢긴, 아! 상처투성이의 <수사학 교육>이 나(페트라르카)의 손에 도착했나이다. … ‘오! 시간이여, … 너는 어떤 것도 지켜주지 않는구나. 너는 제물을 바쳐야만 믿음을 주는구나.’ … 여기저기 풀어헤쳐졌지만, 당신의 아름다운 몸을 보았나이다.”<퀸틸리아누스에게 보내는 편지> 페트라르카가 그토록 보고자 했던 <수사학 교육>은 콘스탄츠 회의(1414~1418) 중에 발견된다. 이 회의는 요하네스 후스의 화형을 결정했고 교황 요한네스 22세의 퇴위와 마르티누스 5세 선출을 논의했던 중요한 자리였다. 이 회의에 문헌 사냥꾼인 포치오도 참석했다. 한데 그의 관심은 회의가 아닌 책에 있었다. 포치오는 주변의 여러 수도원을 방문하였다. 그중 하나가 장크트갈렌(Sankf Gallen) 수도원이었다. 세속의 책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던 수도사들은 책들을 곰팡이가 핀 마대에 담아 창고에 던져두었다. 이 먼지 더미에서 포치오는 <수사학 교육>을 찾아내는데, 이 발견을 알리는 포치오의 편지를 접한 브루니는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한다. “자네가 찾아낸 책이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귀중한 보물임을 알아야 할 것이네.” <수사학 교육>은 1470년 로마에서 처음으로 책으로 세상에 다시 태어났고, 학자들의 번역과 주해를 거쳐서 많은 작가들, 사상가들, 정치가들이 읽고 참조할 수 있는 고전으로 완전히 거듭난다. 르네상스 시대에 서양 고전은 이렇게 재발견되고 부활했다. 그러나 이 부활이 서양 역사에서 처음은 아니었다. 이 현상은 오히려 서양 고대 로마 시대에서 더 자주 발견된다. 이유는 무엇일까? 단적으로 라틴어가 가난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로마인의 탄식을 들어보자. “그때 로마의 문화는 척박했다.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기에, 학문에 큰 힘을 쏟아부을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문법학자와 수사학자에 대해서> 제1장)
로마는 오랜 전쟁으로 인해 학문과 문화를 가꿀 여력이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인이 취한 방법은 그리스 고전의 번역이었다. 언어와 사유의 경쟁력에서 라틴어는 그리스어를 감당해내지 못했다. 호메로스 이후 수많은 시인·철학자·역사가들이 삶에 대한 반성과 세계에 대한 시각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내놓았다. 그리스어에 축적된 지혜는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로 로마인들은 번역과 주해를 통해서 그리스 고전을 직접 수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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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로마의 수사학자이자 교육자였던 퀸틸리아누스 동상. 퀸틸리아누스는 로마가 그리스 정신의 모방 단계를 지나 그리스를 극복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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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학 교육’ 등 교재 만들어
1세기초부턴 그리스어와 경쟁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 같은 당대의 라틴 작품을 드디어 강의 교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정신적으로 정복당한 로마가 이제 그리스 정신의 모방 단계를 지나 본격적으로 경쟁하는 단계에 들어섰음을 확인해 주는 사례다. 로마에서 이 현상이 관찰되는 시기는 대략 서기 1세기 초 무렵이다. 그런데 1세기 말이 되면, 로마인 가운데에 심지어 그리스를 극복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아예 대놓고 로마인이 그리스인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퀸틸리아누스의 주장을 들어보자. “내가(퀸틸리아누스) 보기에, 키케로는 그리스인들의 모방하는 일(ad imitationem)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연설로 데모스테네스의 역동하는 힘과 플라톤의 깊이 있는 사유와 이소크라테스의 유쾌한 즐거움을 오롯이 새겨내었다.”(<수사학 교육> 제10권, 1장 108절)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단적으로 그리스인에게 호메로스가 있다면, 우리 로마인에게는 베르길리우스가 있다”(<수사학 교육> 제10권, 1장 85절)라는 주장에서 볼 수 있듯이, 로마인의 경쟁력에 대한 퀸틸리아누스의 믿음은 굳건하다. 아마도 이제 라틴어가 가난하지 않다는 자신감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퀸틸리아누스가 로마의 수사학자이자 교육자였음을 주목하자. 그의 고민은 어떻게 말을 잘하도록 교육하는가였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니었다. 교육자로서 그의 최대 관심은 ‘좋은 사람’(vir bonus)을 기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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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원/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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