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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7.16 20:01 수정 : 2011.06.07 11:05

아가멤논 왕에게 자신의 딸을 되돌려달라고 간청하는 크뤼세스의 모습을 그림으로 묘사한 도자기.(<일리아스> 제1권 11~32행)

고전 오디세이 ⑩ ‘서사의 아가멤논’대 ‘비극의 아가멤논’

“노래가 비록 불편하더라도 권력으로 막으려 하지 말라 사람들의 귀가 들으려 하기에”

“백성의 소리 겸허히 듣고 섬김의 리더십이 충만한 우리 아버지같은 왕이여”

유행은 왜 바뀌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주요 원인일 것이다. 이에 대한 최초의 관찰자가 호메로스(기원전 8세기)이다.

어머니, 소중한 가인(歌人)이 자기 생각 가는 대로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을 왜 어머니께서 막으려 하세요? (…)/ 사람들은 자기들 귀에 가장 새롭게 들리는 노래를/ 즐거워하고 좋아하니까요.(<오디세이아> 제1권 346~352행)

고전 오디세이

가인의 노래를 제지하는 어머니 페넬로페에게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하는 말이다. 비록 노래가 불편하다 해도 그것을 막지 말라고 한다. 물론 권력으로 가인의 입을 당장은 막을 수 있지만, 이를 원천적으로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귀는 새로운 노래를 좋아하고 듣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름 일리 있는 주장이다. 그러면 사람들의 귀가 듣고자 하는 힘에 대해서, 그러니까 욕망의 변화에 따라 유행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살펴보자. 이를 잘 설명해 줄 인물은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일 것이다. 우선 아가멤논의 이름풀이부터 하면, ‘아가’(aga)는 ‘놀라움’과 ‘대단함’을, ‘멤논’(memnon)은 ‘견지’ 또는 ‘고집’을 뜻한다. 이를 토대로 아가멤논을 풀이하면, ‘대단한 고집쟁이’ 정도의 의미이다. 좋게 말하면 ‘뚝심왕’, 나쁘게 말하면 ‘고집불통’ 또는 ‘소통불능의 왕’ 정도를 의미한다 하겠다. 이는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이 벌이는 다툼에서 확인된다.


그대(아가멤논), 파렴치한 철면피여, 우리가 그대를 따라 이곳에 온 것은/ 메넬라오스와 그대를 위하여 트로이아인들을 응징함으로써/ 그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함이었소.(<일리아스> 제1권 158~160행)

물론 아가멤논이 ‘파렴치한 철면피’인지에 대해서는 따져 보아야 하겠지만, 그가 고집불통의 왕이었음은 분명하다 하겠다. 이는 아가멤논 본인의 입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나(아가멤논)는 그대(아킬레우스) 일에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며/ 그대가 분노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이오. (…)/ 내 몸소 그대의 막사로 가 그대의 명예의 선물인/ 볼이 예쁜 브리세이스를 데려갈 것이오. 그러면 내가 그대보다/ 얼마나 더 위대한지를 잘 알게 될 것이며, 다른 사람도 앞으로 감히/ 내게 대등한 언사를 쓰거나 맞설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이오. (<일리아스> 제1권 180~187행)

호메로스는 강조하지 않았지만, 아가멤논의 이름에는 분명 긍정적인 면이 있다. ‘아가멤논’은 통치자로서 유지해야 할 항상성과, 지도자가 가져야 할 일관성을 상징한다. 어쨌든 트로이 전쟁을 총괄하고 최종적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인물은 아킬레우스가 아니라 아가멤논이었다. 이런 면에서 ‘아가멤논’은 지도자로서 가져야 할 일관성을 상징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고, 나름대로 생각해 볼 거리가 많은 이름이다.

그런데 왜 호메로스는 아가멤논을 고집불통의 인물로 그렸을까,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또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고집불통의 왕인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다툼이 도대체 역사적으로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물론 호메로스는 이 문제를 의식하고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이것은 정치 제도로서 왕정이 가지고 있는 ‘자의적 지배’의 한계를 보여주는 서양 고대 문학사에 있어서 최초의 문헌 텍스트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아가멤논의 통치 방식이 아무리 일관적이고 항상적이라 할지라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 한계는 뚜렷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나타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다툼은 왕정에서 귀족정으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물론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아가멤논은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왕이었다. 그러나 이런 고집불통의 아가멤논은, 왕정이 아닌 공동체 중심의 폴리스(도시국가)에서 민주주의가 대세를 이루던 시대에 오면 좀더 다른 모습의 인물로 바뀌어 그려진다. 다음은 아가멤논에 대한 비극시인 아이스퀼로스(기원전 525~456년)의 묘사이다.

그 밖의 다른 일들은 회의를 열어/ 모든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의논하기로 합시다.(<아가멤논> 844~845행)

더 이상 아킬레우스와 다투었던 소통불능의 아가멤논이 아니다. “회의를 열어 모든 사람들이 모인 자리를” 주도하고 주관하는 민주적인 지도자로 탈바꿈해 있다. 뿐만이 아니다. 하늘을 찌르던 오만함 대신에, 백성들 또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겸손과 섬김의 리더십을 중시하는 정치가로 변신해 있다. 이와 관련해서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에 등장하는 아가멤논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마치 동방의 군주인 양 머리를 조아리며/ 큰소리로 칭찬하지 말고, 길에 천을 깔아/ 신들의 시기를 사지 않도록 하시오. (…)/ 하지만 백성들의 목소리는 큰 힘이 있는 법이오.(<아가멤논> 919~938행)

아가멤논의 변모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은 그래도 왕정 시대의 왕은 아니어도 지도자로서의 품위와 격조를 잃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에우리피데스(기원전 485~406년)의 비극에 등장하는 아가멤논은 도대체 그가 왕인지 지도자인지를 의심해야 할 정도로 평범한 인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나(아가멤논)는 자네가 부럽네. 할아범, 세상에 알려지거나 명성을 얻지 못해도/ 위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는 부럽기만 하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부럽지 않네.(<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17~19행>)

이 대사는 트로이아로 출항하기 위해서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해야 하는 대목에서 아가멤논이 늙은 하인에게 던지는 넋두리다. 이쯤 되면 그가 과연 믿고 따라야 할 지도자인지 도무지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오히려 평범한 소시민에 가까운 모습이다. 오히려 늙은 하인이 이렇게 충고할 정도이다.

지도자가 그런 감상에 빠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나이다. (…)/ 누군가 나리께서 안절부절못하시는 것을 보게 되면,/ 나리께서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여길 것이옵니다.(<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28~41행)

결론적으로 말해 서사시의 아가멤논과 비극의 아가멤논은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달라져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변화의 원인은, 물론 텔레마코스의 지적대로, 당연히 사람들의 ‘새로운 것을 듣고자 하는 호기심’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새로운 것에 대한 단순한 욕망일 뿐 아니라 시대정신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적어도 서양 고대 아테네의 경우 그 욕망은 민주주의라는 시대정신이었다. 유행은 표면적으로는 집단 취향의 변화이지만, 그 심층에는 시대정신이 함께 작동하고 있는 문화 현상이기 때문이다. 서사시가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담아내기에 한계를 보이자, 그리스인들은 새로운 표현 방식으로 비극을 발전시켰다. 때문에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는 새로운 그릇인 비극이 역사 무대의 중심에 서게 된다.

요컨대 어떤 새로운 형식과 내용이 곧 새로운 문화를 표현하고 관장하는 주류로 자리 잡게 될 때에 학자들은 이를 ‘시대사조’(epoche)라 부르는데, 비극의 시대가 전통적인 서사시의 시대를 대체하게 된 배경에는 민주주의의 발전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표현 장르인 비극으로 환호하며 몰려갔던 그리스 시민들과 그들의 역사가 그 결정적인 예증이다.

안재원/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한데, 흥미로운 점은 다른 어떤 작가들이 그려내는 아가멤논보다 더 이상 왕 같지도 않은 에우리피데스의 아가멤논에 대해 그리스 시민들과 그 뒤 서양인들은 물론, 현대 독자들까지도 더 열광하고 더 사랑한다는 것이다.

왜일까? 혹시 에우리피데스의 아가멤논에게서 과로와 피곤에 지쳐 초라한 모습으로 퇴근해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기에 그런 것은 아닐는지.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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