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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3.04 21:11 수정 : 2011.06.07 11:14

고전 오디세이 (26)
역사와 소문 그리고 소셜네트워크

살아있는 역사의 기록관 ‘클리오’. 문자에 의해 퇴출당한 뒤 뒷골목을 전전했다. 하지만 소셜네트워크의 등장으로 클리오는 다시 빛을 보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트위터가 바로 또 다른 모습의 클리오가 아닌가.

2010년에 방영된 드라마 <동이>는 사실(事實)일까? 아니면 허구일까? 아니면 이 드라마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사실(史實)’일까? 이렇게 물어보자. 역사학은 엄밀한 과학일까? 아니면 느슨한 이야기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이와 관련해서 기원전 1세기에 벌어진 로마의 이른바 ‘역사’ 논쟁을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핵심 쟁점은 소위 로마의 원천 문제를 다루는 상고사(上古史) 논쟁이었다. 이는 심지어 디오니시오스 할리카르나소스와 같은 그리스 학자의 주요 관심사로 자리잡을 정도로 뜨거운 이슈였다. 이렇게 상고사 문제가 로마 지식인의 관심을 사로잡은 이유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로마의 정체성 규정과 맞닿아 있는 물음이기 때문이었다. 상고사 문제는, 그러니까 역사 기술 문제는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갈 때에 로마 제정의 합리화, 곧 아우구스투스의 황제 등극과 그의 통치의 정당화를 위해서 베르길리우스나 호라티우스 같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로마 역사를 조작하고 합리화하는 작업이 시도되었기에 로마 지식인의 주요 화두로 자리잡았다. 대표적으로 베르길리우스는 로마의 기원에 대해서 자신의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통해서 트로이를 로마의 뿌리로 삼았고, 아우구스투스가 아이네아스의 직계 후손이라고 노래한다. 이를 통해 그는 아우구스투스가 제우스의 후손이라 주장한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천상의 세계를 대리하는 황제임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였다. 표현은 제일시민(princeps)이었지만, 실질적으로 황제였다. 하지만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아스’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근거가 빈약한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것이 실은 엔니우스의 <연대기>에 처음 나오는 전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후대에 가서는 정사로 혹은 역사로 자리잡았지만 말이다. 물론 리비우스는 베르길리우스처럼 문학적 기법을 이용해서 신화를 역사로 직접 바꾸지는 않았다. 리비우스의 입장 표명이다.

세상의 소식을 전하고 있는 소문(fama)의 여신상.
로마가 건국하기 이전의 역사와 건국하기까지의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사실(史實) 중심의 기록보다는 시인들의 입을 통해서 지어진 이야기를 통해서 전해진 것들에 대해서는 찬성할 생각도 반박할 생각도 전혀 없다. (<로마건국사> 서문)

하지만 로마가 트로이를 계승했고 로마인이 트로이아인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그것이 신화이든 사실이든, 그 이야기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리비우스는 베르길리우스와 큰 차이가 없다. 어떤 점에서는 베르길리우스보다 훨씬 더 세련되게 접근했다. 로마인이 트로이 왕족인 아이네아스의 혈통이라는, 소위 전설에 불과한 이야기를 교묘하게 역사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키케로는 <국가론>에서 리비우스와 다른 입장을 취한다. 로물루스 이후 왕정 역사를 다루지만, 키케로는 로마 공화국이 왕정을 계승하는 국가가 아니라고 봤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 계승 문제는 현대적인 논의이다. 그러나 이 논의가 반드시 현대적인 시각만은 아니다. 폴리비오스나 바로(Varro)와 같은 학자들이 국가의 시작과 끝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 시대는 어떠한 기준에서 분류해야 하는지, 역사 기술은 어떤 관점에서 서술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결론적으로 상고사 문제는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정체(政體) 및 국체(國體)의 성격 변화와 전환과 직결된 문제였고, 특히 기원전 1세기 말에 이르러 로마의 지식인 세계의 최대 논쟁점이었다. 특히 역사 서술 논쟁은 기원전 1세기 로마 지성인들의 최대 담론이었다. 이는 키케로의 저술에서도 확인된다.


누가 모르겠는가? 어떤 것이든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이것이 역사의 제1 법칙이라는 점을 말이네. 역사의 제2 법칙은 진실을 말함에 있어서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고, 제3 법칙은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어떤 당파의 이익에 따라 편파적이어서도, 어떤 적개심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오. (<연설가에 대하여> 제2권 62장)

이 말은 키케로의 역사관이 리비우스와 크게 다름을 보여준다. 리비우스가 소위 현대적 의미의 ‘자국중심주의’의 당파적 노선을 추종했다면, 키케로는 이른바 ‘보편적 진실주의’ 노선을 따랐다. 물론 키케로가 로마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특정 개인이나 특정 정파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해야 한다는 것이 키케로의 역사관에서 핵심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텍스트가 <국가론>이다. 로마 공화국의 역사(Historia de Re Publica)가 이 책의 주요 골자이다. 베르길리우스의 역사관이 한 개인의 영웅숭배와 제국 성립의 정당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키케로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본다. 이 점은 키케로가 로마 공화국을, 그 이전의 왕정을 계승하는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명백하다. 아직 국사(國史)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서양 역사에서 소위 공동체사(共同體史)에 대한 언급이기에 키케로의 언급은 의미 있다. 또한 신화에서 사실(史實)로, 이야기에서 역사(歷史)로의 전환이 일어나는 순간이기에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하지만 키케로의 역사관은 거시적 역사 서술의 관점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미시적 역사 서술에 대한 논의는 서양 고대에 없었을까?

예컨대 소문은 어떨까? 소문도 역사일까? 단적으로, 소문이 본디 역사가 아니었던가? 소문의 여신 클리오(Klio)의 이름은 본디 ‘들어서 알다’라는 그리스어 클루에인(kluein) 동사에서 유래했다. 풀이하자면, ‘들어서 아는 자’이다. 클리오는 귀 밝고 머리 맑은 ‘총명’(聰明)이었다. 어머니가 므네모시네(Mnemosyne, 기억)라는 점에서 그녀는 어머니 유전자에 가장 가까운 유전자 구조를 가진 무사(Musa, 巫史)였다. 이런 까닭에 제우스는 클리오에게 ‘소문과 명성’에 대한 업무를 맡기었다. 예를 들면, 누가 “불사의 제신들이 정해놓은 법도와 전통을 숭상하고 빛나게 하는지”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 그에 대한 명예와 이에 합당한 지위와 보상을 내리도록 보고하는 것이 클리오의 일이었다. 소문으로 들은 사실과 진실을 추적하고 이를 기억에 보관해야 하는 구술 기억의 시대에 클리오는 어쩌면 가장 ‘권세 있는’ 보직의 수행자였다. 문자가 없었던 구술 세계를 통치했던 제우스 시대의 역사를 관장하는 일을 맡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진실과 공명 정대의 정신으로 그토록 제우스의 사랑을 받았지만, 가는 세월은 어찌할 수 없고 변화는 어찌할 수 없었나 보다. 그 좋던 자리의 주인인 클리오도 한 번 기록되면 고치기를 거부하는 고집불통의 동생인 ‘문자’(litera)가 태어나자, 자기의 자리를 동생에게 넘겨주고 쓸쓸히 광장 뒷골목으로 사라지는 운명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제 클리오는 뒷골목에 사는 소문의 여신으로 추락하고 만다. 하긴 제우스는 물론 올림포스에 거주하는 신들이 모조리 천상에서 밀려나는 운명을 겪게 되는 상황이니, 클리오만의 불행은 아니었다. 어찌되었건, 문자에 의해서 광장에서 뒷골목으로 퇴출당한 클리오는 이름도 ‘소문’(fama)으로 바꾼다. 완전히 쫓겨난 것은 아니었다. 역사의 무대에서 눈에 띄지는 않지만 그래서 기록되지 않지만 망각에 묻혀서는 안 되는 진실의 목소리들을 돌보는 일을 묵묵히 수행하였을 뿐이기에. 가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진실의 힘으로 자신의 위력을 드러내기도 하고, 가끔 작아 보이지만 ‘바늘’ 같은 진실 하나로 거대한 권력을 무너뜨리는 일이 그의 일이었다. 때론 산간 외지의 슬픈 사연을, 때론 저 멀리 아랍의 도시 골목골목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때론 우리네 숨어서 베푸는 사람들의 훈훈한 사랑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시대의 증인으로, 살아 있는 역사의 기록관으로 소문의 여신은 3000년 동안 우리 곁을 이런 방식으로 지켜주고 있다. 이런 노력 덕분일까? 누가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지를 알았을까? 골목골목 아니 주머니 주머니에 ‘소문의 광장’이 세워질 줄, 아니 주머니에 ‘우주와 혁명’을 넣어가지고 다닐 줄, 이를 통해 클리오가 예전의 ‘명성’과 ‘지위’를 다시 찾게 될 줄, 과연 누가 알았을까? 요즘 유행하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가 실상 클리오의 또다른 모습일 테다. 혹은 소문의 여신이 다시 현현(顯現)한 것일 테다. 소문계(所聞界) 혹은 ‘트위트계(界)’를 오비디우스만큼 잘 묘사한 이가 없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세상 한가운데, 바다와 대지와 하늘의 중간에,/ 우주 삼계(三界)가 서로 만나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뭐든 다 보이고, 열린 귀로 뭐든 다 들린다./ 이곳에 소문의 여신, 파마(fama)가 산다./ 꼭대기에 그의 거처가 있다. 이곳은/ 수많은 입구와 수천 개의 통로가 나 있고,/ 문은 문짝이 없어 밤낮으로 열려 있다. (<변신이야기> 제12권 39~46행)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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