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오디세이] 27
그리스인들의 세상에 대한 풍자
스테시코로스의 우화-사슴과 말
우화는 단순히 아이들의 교육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고도의 정치적인 함축을 담고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촌철살인’ ‘양날의 칼’을 가진 우화를 정치적 연설법, 곧 수사학적 ‘예시법’으로 소개한다.
“말 한 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사슴 한 마리가 초원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달아났습니다. 말은 화가 났고, 사슴에게 보복을 다짐했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사람에게 말은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기꺼이 승낙했지요. ‘내가 창을 구해올 테니, 네 입에 재갈을 물리고 네 위에 올라탈 수 있도록 해주겠니? 그러면 사슴을 찾아내 죽여 네 노여움을 풀어주마.’ 말은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슴에 대한 보복은 성공했지만, 말은 그 사람을 평생 동안 태우고 다녀야만 했습니다.”
우화의 이미지 몇 컷이 떠오른다. 초원과 말. 날뛰는 사슴과 분노한 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사슴. 피 묻은 창을 들고 의기양양한 그 사람. 그를 태우고 머리를 떨어뜨린 말의 망연자실한 눈빛. 후회의 눈물. 그것들은 알레고리로서 또다른 그림을 떠오르게 할 것이다. 여러분이 일상 속에서나 관심 분야에서, 사업이든, 정치든, 외교든 몸담고 있는 전문 분야에서 겪는 경험의 그림을. 그 그림 속에서 여러분은 사슴일 수도 있고, 사슴을 죽인 사람일 수도 있으며, 복수에 눈멀어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들다 낭패를 본 말일 수도 있다.
이 우화는 기원전 6세기께 그리스의 서정시인 스테시코로스가 시칠리아 섬의 히메라 시민들에게 한 연설의 일부였다. 여기에 그는 경고를 덧붙였다. “히메라 시민 여러분. 적들에게 보복하겠다는 의욕에 불타서 어리석은 말이 겪는 일을 겪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재갈이 물린 상태입니다. 팔라리스 장군에게 절대적인 군사적 자율권을 주었으니까요. 그런데 그에게 막강한 친위대까지 준단 말입니까? 그가 그 위에 올라타면, 여러분은 그의 노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 어리석은 말처럼 말입니다.”
우화에 2500여년 전 시칠리아의 정치 상황이 겹쳐진다. 우리는 그 그림 위에 저마다의 현재 상황을 겹쳐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반도를 하나의 평온한 풀밭으로, 우리를 한 마리 말로, 북한을 사슴으로 그려볼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사슴의 도발적인 행동에 분개하고 복수를 꿈꾸는 말이 되어, 그 결과를 차분하게 계산하지 않은 채, 누군가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하고 복수를 맡기려는 말이 된다. 그리고 묻게 된다. ‘그러다가 우리는 뜻하지 않게 무거운 굴종의 시절을 보내게 되는 말처럼 되는 것은 아닌가?’ 그때 우화는 우화로만 끝나지 않는다. 우의(寓意)적 상상력은 우리가 직면한 상황의 핵심 쟁점과 차후의 전망을 단순화시켜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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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에 출간된 <이솝 우화>에 실린, 아서 래컴의 일러스트레이션 ‘토끼와 거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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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소포스의 우화 1-수렁에 빠진 여우
서양 문화 전통에서 우화의 레전드로 꼽히는 사람이 바로 아이소포스다. 흔히 이솝으로 알려진 그는 기원전 6세기 중엽에 그리스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신분은 노예였지만, 그의 지혜는 각국의 지도자나 지식인들에겐 귀중한 지침이 되곤 하였다. 그의 우화는 서구 문화에 하나의 전통을 형성했다. 어느 날, 그는 사모스 섬에서 연설을 했다. “여우 한 마리가 물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움푹 파인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지요. 여우는 발버둥을 쳤지만,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수많은 흡혈 진드기들이 달라붙어 여우의 피를 빨아먹었지요.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고슴도치가 여우를 보고 물었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요? 제가 진드기라도 쫓아드릴까요?’ 그러나 여우는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아니, 그냥 놔둬.’ 고슴도치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요. 여우는 대답했습니다. ‘지금 이놈들은 아까부터 나에게 붙어서 내 피를 충분히 빨아먹었으니, 앞으로는 조금씩만 빨아먹을 거야. 하지만 네가 지금 이놈들을 쫓아내면, 나를 노리고 있던 굶주린 놈들이 새롭게 달려들어 내 남은 피를 빨아먹겠지? 그럼 난 견딜 수 없지. 그러니 그냥 놔둬.’ 여우를 그 수렁에서 꺼내줄 수 없다면, 고슴도치는 그냥 지나가는 것이 여우에게 도움이 되겠지요?”
이솝의 우화도 그림을 그려준다. 수렁에 빠진 여우와 여우의 피를 빨아 먹는 진드기. 착하지만 무력한 고슴도치. 이 그림에도 우리가 겪는 현실의 어떤 이미지가 떠올라 겹쳐질 것이다. 예를 들면, 부정부패한 고위 관리를 파면시키고 새로운 사람을 뽑으려고 하는데, 거론되는 후보자들이 하나같이 파면된 사람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은, 한심하고 절망적인 현실. 현실이 우화와 중첩될 때, 촌철살인처럼 던져지는 메시지는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다. 우화의 달인 이솝은 어떤 상황에서 여우와 진드기의 우화를 던졌을까?
“사모스 시민 여러분. 진정하시고 잘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직접 뽑은 이 관리를 정죄하여 죽이려고 합니다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은 이제 더는 여러분에게 큰 해를 끼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말씀대로 이미 많이 해먹었으니까요. 더는 그렇게 크게 해먹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 사람을 처형하고,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앉히면, 굶주리며 기회를 노리던 그는 여러분에게 남은 것마저 깡그리 도적질해서 먹어치울 것입니다.” 어이없고 허탈한 결론이다. 이솝의 변론은 성공했을까? 결과는 알려지지 않지만, 그 관리가 사면되었다면, 그것은 순전히 우화가 갖는 정치적인 설득력 덕택일 것이다.
아이소포스 우화 2-토끼와 거북이
이와 같이 우화는 단순히 아이들의 교육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고도의 정치적인 함축을 갖는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화를 설득력이 매우 높은 정치적 연설법의 하나, 곧 수사학적 ‘예시법’으로 소개한다.(<수사학> II, 20, 1393a23~94a18)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우화는 상황의 실체와 미래의 모습을 알기 쉽게 요약하고 인상적인 이미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분명 우화는 매력적인 언어의 연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허점도 있고 위험하기도 하다. 이솝 우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토끼와 거북이’를 볼까? “누가 더 빠른가를 두고 논쟁을 하던 토끼와 거북이는 급기야 경주를 하기로 한다. 토끼는 타고난 속력을 믿고 경기 도중 잠을 자고, 거북은 자신이 느리다는 것을 알고 쉬지 않고 달렸다. 쉬지 않고 달린 거북이가 결국 승리했다.”
흔히 우리는 이 우화로부터 ‘능력이 부족한 사람도 열심히 노력하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교훈을 끌어낸다. 정확하게 말하면 토끼 같은 사람이 방심할 경우에는 거북이 같은 사람도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토끼가 열심히 달리기만 한다면, 거북이는 결코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말이다. 거북이에게는 정말 절망적인 메시지다. 따라서 이 우화는 거북이가 아니라 토끼 같은 사람들에게 더 적합한 것 같다. ‘실력만 믿고 노력하지 않다가는 어이없이 패배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 토끼가 이 말을 명심하면, 언제나 이긴다. 애초부터 이 경기는 거북이에겐 승산이 없는 게임이니까. 여러분이 거북이라면 이런 게임에 응하겠는가? ‘노력하라. 쉬지 말고 뛰어라. 그러면 혹시 아니, 승리할지!?’ 이 말을 듣고 거북이가 게임에서 최선을 다해도 이길 확률은 아주 낮다. 솔직히 이것은 거북이를 위한 우화일 수 없다. 비참한 패배가 뻔한 게임 속으로 승리를 거둘 수 없는 보통의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환상을 조장하는 현혹의 우화. 구조적으로 불공정한 게임을 거부하는 대신, 어쩌면 승리할 수도 있으니 열심히 하라는 메시지가 담긴 위험한 우화다.
그래서 거북을 위한 우화로 새롭게 바꾼 사람들도 있다. 능력만 믿고 당신을 무시하는 경쟁자를 이기기 위해선, 무조건 뛰어들지 말고 지혜로운 전략을 짜라는 교훈을 담아낸 것이다. 그중 하나. “거북은 경주를 수락하면서, 대신 코스는 자신이 정하겠다고 했다. 토끼가 동의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토끼는 열심히 달렸고 월등하게 앞서나갔다. 그런데 결승점을 얼마 앞두고 토끼는 멈추고 말았다. 앞에 강물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끼가 꼼짝없이 쩔쩔매는 동안, 한참 후에 도착한 거북이는 유유히 강물을 헤엄쳐 건너 결승점에 먼저 도착했다.” 삶이 변한다면, 삶을 비출 우화도 변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게임도 승부도 있으나, 거북이의 도전을 그 자체로 격려할 수 있는 우화라든가. 거북이와 토끼가 서로 경쟁하거나 반목하지 않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는 우화라든가. 거꾸로 새로운 상상력을 구상할 때, 새로운 질서와 세계가 열린다. 그리고 그때 그리스의 우화는 쓸모 있는 밑판 구실을 할 것이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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