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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4.01 20:32 수정 : 2011.06.07 11:15

학문 자체의 목적에 봉사하고 인문학의 본령인 자유로운 정신을 기르고 가꾸는 일을 중시했던 아티쿠스의 흉상. 서기 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현재는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전 오디세이] 28. 전기와 역사의 차이에 대하여

로마의 네포스는 역사서술을 버리고 전기를 쓰겠다고 선언했다. 인물을 중심으로 역사를 말하고 역사학이라는 거시적인 그물로 포착되지 않은 미시적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렇게 숱한 전투와 전쟁을 수행했던 가장 용맹스러웠던 장군 한니발은 70살의 (*실제로 한니발은 63살에 죽었음) 삶에 휴식을 주었다.”(네포스 기원전 100~27년), <로마 밖 종족들의 위대한 지도자들에 대해서> ‘한니발’ 편)

로마인에게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우리 식으로 치면,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네포스는 이런 인물에게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심지어 그를 아주 객관적으로, 또한 공정하게 묘사한다. 우리 정서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누군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애를 네포스의 시각으로 묘사한다면, 우리의 독자들의 반응이 어떨지 자못 궁금하다. 그렇다면, 네포스의 이런 ‘열린 마음’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고, 이런 열린 마음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선 <로마 밖 종족들의 위대한 지도자들에 대해서> 서문을 읽어보자.

아티쿠스여, (…) 그들은(아마도 로마의 독자들) 대개 자신의 상식과 전통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이들로, 대개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은 것들은 모조리 잘못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만약 명예롭고 추한 것들에 대한 판단 기준이 어느 종족에게나 모두 똑같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기준이 자신들의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의 관점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내가 그리스인의 덕성과 뛰어남을 저술함에 있어서 그리스인의 시각과 기준에서 그것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과히 놀랄 일이 아님을 깨우쳐 볼 것이오. 예컨대, 아테네의 저 유명한 키몬의 경우, 그에게는 그가 자신의 누이를 아내로 취했다는 점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닐 것이오. 왜냐하면, 키몬은 그리스 풍습을 따랐을 뿐이기 때문이오. 물론 우리의 기준에 따르면, 이런 결혼은 당연히 불경죄에 해당하지만 말이오.

네포스의 주장은, 현대적인 의미의 개방적인 다원론자나 문화적 상대주의자의 그것이기에, 상당히 흥미로운 입장 표명이다. 그는, 예컨대 그리스 사람을 묘사할 때에는 로마의 시각이나 기준이 아닌 그리스인의 그것에 입각해서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입장은, 소위 종족과 국가의 이익 관점에서 역사를 보려는 시각을 넘어서 있다는 점에서 또한 관심을 끈다. 이 대목에서 로마 시대에 사관(史觀) 문제가 이미 논의되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고대 로마인에게서 현대적 의미의 사관에 대한 ‘의식’이 발견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써야 하고, 어떤 입장에서 역사를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많았다. 이는 단적으로 “왜냐하면 내가 펠로피다스의 행장(行狀)을 기술하려 함에 있어서 내가 전기(vitam eius ennarare)를 쓰는 사람이 아닌 역사(historia)를 쓰는 사람으로 보일까 두렵기 때문이다”(<로마 밖 종족들의 위대한 지도자들에 대해서> ‘펠로피다스’ 편) 네포스의 주장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물론 전기라는 전문 용어 ‘비오그라피아’(biographia)를 사용하진 않지만, 네포스는 과감하게 역사 서술을 버리고 전기를 쓰겠다고 선언한다. 이유는 이렇다. 예컨대, 펠로피다스는 그리스의 테베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을 로마나 이탈리아의 관점에서 서술하게 되면, 그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무래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국가나 집단 기억을 기록하는 역사 서술을 포기한다. 대신에 그는 국가나 종족의 이해와 관점으로부터 벗어나 개인을 개인으로 보고, 한 개인의 삶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기술하려고 노력한다. 이처럼, 개인에 대한 고유한 기억을 기록한다는 점에서 역사 서술과는 다른 새로운 글쓰기 방식인 전기는 네포스와 같은 전기 작가의 문제의식을 통해서 발전했다.

단적으로, 역사는 공동의 기억을 다루기에 그 접근 구조가 거시적이다. 하지만 전기는 개인을 접근함에 있어서 소소하지만 고유한 특성들을 포착해내는 미시적 접근을 중시한다. 이 점에서 전기는 역사와 다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역사가 집단의 이해관계로부터 덜 자유롭다면, 전기는 상대적으로 더 자유롭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 대목에서 ‘왜 굳이 전기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건 중심의 기술이 아닌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역사(歷史)를 밝힌다는 점과 역사학이라는 거시적인 그물로는 포착되지 않은 미시적 사실(史實)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물론 전기가 다루는 내용들이 작고 보잘것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 사람이라는 점에서 결코 작은 대상이 아님에 주목해야 한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전기는 결코 변변찮은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근본적으로는 역사의 중심은 사람이라는 점을 밝히는 일이 바로 전기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전기란 사람을 중심으로 역사를 구성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텍스트이다. 그런데 한니발의 예를 통해서 보았듯이, 전기는 사람 중심의 접근을 통해서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예컨대 ‘로마인의 열린 시각’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렇게 주요 사건 중심의 거시 역사를 보완한다는 점에서 전기는 미시 역사의 중요한 한 방법이라 하겠다. 하지만 사건 중심의 역사 보기가 아닌 ‘역사 속의 사람’을 드러나게 한다는 점에서, 전기는 ‘사건 중심의 역사’에 호응하는 짝패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전기 텍스트가 하나의 글쓰기 장르로 탄생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사람이 있다. 바로 아티쿠스다. 네포스가 하나의 문학 장르로 전기를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인 후원을 해 주었던 이가 그였기 때문이다. 이는 네포스가 자신의 저서 <유명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를 아티쿠스에게 헌정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그렇다면, 아티쿠스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키케로의 후원자이자 친구로서 그리스 문화와 사상을 사랑하고 로마에 적극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노력했던 재력가였다. 아티쿠스라는 이름도 그가 아테네를 사랑했고 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그리스의 아티카 지방에서 보냈다는 데에서 유래했다. 에피쿠로스 사상을 추종했던 그는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키케로와는 달리 은둔과 여유의 삶을, 곧 에피쿠로스 학파의 정신에 따라 ‘숨어사는 삶’(lathe biosas!)을 즐겼다. 친구 키케로가 네 번이나 경제적 파산을 겪었을 때, 그가 정치 활동은 물론 학문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아티쿠스의 절대적 후원 덕분이었다.

대개 인문학의 대표적인 후원자로 르네상스 시대의 메디치 가문을 든다. 그런데 메디치 가문이 모델로 삼았던 이가 마이케나스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적 동지로,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의 절대적 후원자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아티쿠스가 주로 키케로와 같은 자유 사상가와 정치가를 후원했다면, 마이케나스는 주로 시인을 중심으로 하는 문인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후원의 배경에서 탄생한 작가들이 호라티우스고 베르길리우스다. 요컨대 <아이네이스> 같은 작품은 전형적인 로마식 용비어천가이다. 이렇게 마이케나스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공화정으로의 회복을 주장하는 연설가보다는 시인들을 후원하게 된 배경은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위해서 아우구스투스의 황제 통치가 하늘의 뜻이라고 홍보하고 설득하기 위함 때문이었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반면에 아티쿠스는 학문이나 문학이 그 자체의 목적 이외의 다른 목적에 봉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학문 자체의 목적에 봉사하고 인문학의 본령인 자유로운 정신을 기르고 가꾸는 일을 중시했다. 그는 심지어 그리스 출신의 노예까지도 후원했다. 키케로와 같은 중요 인사에게만 후원한 것이 아니라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소장 학자까지도 신분과 출신에 관계없이 후원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네포스다. 이런 사실로부터, 국가나 종족의 관점에서 해방되어 개인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네포스의 주장은 어쩌면 아티쿠스의 경제적 후원과 정치적 지지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적어도 전기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시선 혹은 공동체의 관점에서 해방될 때 가능하기에 그렇다. 특히 전기가 탄생하는 시점이 공화정에서 제정기로 넘어가는 시점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런 일은 네포스가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기에 말이다. 아마도 경제적 후원자로서 그리고 정치적 지지자로서 아티쿠스와 같은 인문학의 후원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기에 말이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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