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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4.15 20:18 수정 : 2011.06.07 11:16

페르세포네를 납치해 가는 죽음의 신 플루톤. 플루톤은 하데스라고도 불린다. 그는 죽은 자들의 혼백이 모여드는 지하세계를 다스린다. 그곳으로 한 번 들어간 인간은 결코 되돌아올 수 없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데 만약 그가 이 땅을 지배하게 된다면?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의 작품(1621~1622).

데메테르는 땅에 자라는 식물을 주관한다.
그녀가 활기차면 풍요로운 곡식이 나고, 그녀가 우울하면 식물이 잠들었다.
어딘가 잔인한 올봄, 플루톤이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를 땅위로 보내지 않은건 아닐까.

[고전 오디세이]
29. 봄을 그리는 그리스인들의
신화적 상상력

봄이 오는 까닭은?

왜, 봄은 오는가? 꿈을 꺾고 시들어 죽어가던 영혼에 왜, 무엇이, 새로운 희망을 키워내는가? 여리디여린 새순이 어떻게, 갑옷처럼 단단한 나뭇가지의 살갗을 터뜨리며 솟아나는가! 죽은 듯이 황폐했던 땅을 뚫고 풋풋한 새싹이 싱싱한 발톱처럼 돋아나는가! 너무나 눈부셔,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풍경.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 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나니”(T.S. 엘리어트, <황무지>) 뜨거운 여름이 폭죽처럼 터지다, 가을로 무르익어가더니만, 온 땅을 초토화시키며 겨울이 온다. 앙상한 가지만이 해골처럼 남는 동(冬). 푸름이 허물어져 잿빛으로 나뒹구는 땅. 강철같이 단단한 바람에 모든 것이 얼어붙는 계절. 누가 이토록 절망하였기에 겨울은 오는가? 그리고 왜, 봄은 다시 찾아오는가?

그 비밀을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는 짤막하게 노래했다. “제우스는 많은 것을 키워내는 데메테르의 침대로 갔지. / 그녀는 낳았어, 우윳빛 팔을 가진 페르세포네를. 그런데 하데스가 그녀를 / 데려갔지, 어머니의 곁에서 몰래. 하데스에게 넘겨준 거야, 계략에 뛰어난 제우스는.”(<신통기> 912~4행) 여기서 주목할 주인공은 데메테르. 그녀는 땅에 자라는 식물을 주관한다. 그녀가 활기차게 움직일 때, 땅은 아름다운 꽃과 풍요로운 곡식과 과일을 맺는다. 이것을 먹고 동물과 인간이 살아간다. 그래서 시인은 “많은 것을 키워내는 데메테르”라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무슨 비밀이 있나? 좀더 자세한 이야기는 <데메테르 여신에게 바치는 호메로스의 찬가>에 남아 있다. 호메로스의 것이라곤 하지만, 그렇게 믿는 고전학자는 하나도 없다. 헤시오도스 이후에 나온 모방일 것이라 추측들 한다. 그곳에서 낱낱이 폭로되는 비밀.

데메테르의 분노와 슬픔

데메테르에겐 딸이 하나 있었다. 아름답고 사랑스런 페르세포네. 그런데 하데스가 그녀에게 반했다. 납치해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그의 집? 바로 지하의 세계, 죽은 자들의 혼백이 거하는 저승세계다. 살아 있는 것이라면 모두가 가길 두려워하는 곳. 제우스조차 하데스의 세계와 통치에 간섭할 수 없다. 제우스가 살아 있는 자들의 왕이라면, 하데스는 바로 죽은 자들의 왕이다. 태어난 순서로 본다면 하데스는 제우스의 형이다. 그는 천하의 제우스에게도 두려운 존재였던가? 제우스는 페르세포네를 요구하는 하데스에게 딸을 허락한다. 제우스의 묵인 속에 하데스는 조카를 납치해 지하세계로 데려간다. 아무것도 모르는 페르세포네, 소리쳐 아버지를 부르지만, 부질없는 짓. 제우스는 신전에 앉아 인간들이 올리는 기도와 제물을 흠향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한편 데메테르는 평화로운 초원에서 한가로이 꽃을 따고 있었다. 행복에 젖어. 장미, 크로커스, 제비꽃, 아이리스, 수선화, 히아신스. 그런데 갑자기 딸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모든 것이 깨져 산산이 흩어졌다. 그녀의 가슴은 고통으로 뛰기 시작했고. 페르세포네, 내 딸아, 무슨 일이냐, 도대체 어디 있느냐? 정신없이 딸을 찾아 헤매었다. 9일 동안 세상을 떠돌던 데메테르는 10일째 되는 날, 모든 것을 본 태양신 헬리오스를 찾아간다. “데메테르여. 진실을 말하겠소. 다른 신들은 탓하지 마오. 구름을 모으는 제우스께서 발목이 아름다운 당신의 딸을 하데스에게 주셨으니. 그의 풍만한 아내가 되라고. 하데스는 그녀를 잡아 마차에 태우고 안개와 어둠이 자욱한 그의 왕국으로 데려갔소. 하지만 수많은 이를 다스리는 왕 하데스가 남편감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말할 순 없소. 당신의 오빠지 않소.”(75~87행)

복수, 황폐해지는 땅

남편이 딸을 오빠에게 넘기다니! 배신감에 치를 떨던 데메테르는 앙심을 품고 맡은 일을 거부한다. 딸을 잃은 그녀가 땅에서 손을 떼자, 땅은 점점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나무가 잎을 떨어뜨렸고, 앙상하게 뼈를 드러냈다. 꽃이 색과 향을 잃고 시들어갔다. 황소들은 쓸데없이 밭을 갈았다. 곡식과 과일이 더는 열리지 않기에. 먹을 것이 없어진 인간 세계는 흉흉하게 메말라갔다. 배고픔과 굶주림에 사람들이 죽어갔다. 세상은 온통 황무지.

보다 못한 제우스는 전령의 여신 이리스를 데메테르에게 보내 올림포스 산으로 올라오라 했다. “데메테르여, 당신을 부르십니다, 아버지 제우스께서. 영원히 존재하는 신들의 종족들에게로 이제 그만 돌아오시랍니다. 제우스의 명령을 따르십시오.”(321~3행) 하지만 데메테르는 제우스의 명령을 무시했다. 그녀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제우스는 여러 신들을 보내 설득을 다시 시도했다. 하지만 데메테르는 모두 거절했다. 그녀의 분노는 오로지 페르세포네를 다시 볼 때, 풀릴 수 있다는 것.

이 말을 들은 제우스는 또 다른 전령의 신 헤르메스를 하데스에게 보냈다. 페르세포네를 당장 데메테르에게 돌려주라고 했다. 만약 고집을 부리고 그녀를 돌려주지 않으면, 데메테르는 화를 풀지 않고, 세상엔 싹이 돋지 않아 인간은 모두 죽고 말 것인즉. 그러면 더 이상 신들은 인간들의 경배를 받을 수가 없으니, 얼마나 변변찮고 타분한 존재가 되겠는가! 하데스는 제우스의 요구를 거역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페르세포네를 잃을 수도 없는 일. 그는 그녀에게 작은 석류 씨 하나를 먹게 한다. 지하세계의 음식을 먹게 되면, 반드시 다시 지하세계로 돌아와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데메테르에게 페르세포네를 보여주기는 하되, 다시금 자기 곁으로 돌아오게 만든 것이었다. 부메랑처럼. 페르세포네를 다시 보게 된 데메테르는 기뻐했지만, 기쁨도 잠시, 그 사실을 알고 다시 괴로웠다.

계절이 바뀌는 까닭

마침내 그녀는 제우스에게 제안했다. 땅을 돌보는 일을 수행할 테니, 딸아이가 일 년의 1/3은 하데스와 함께 있되, 나머지 2/3는 자신과 함께 밝은 세상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 제우스와 하데스는 이를 승낙했다. 마침내 데메테르는 딸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계절은 이렇게 해서 변하게 된 것이다. 페르세포네가 땅위로 나와 데메테르와 함께 지낼 때, 그녀는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땅을 축복한다. 그녀가 기뻐하니 새싹은 돋아나고 곡식이 익어간다. 봄과 여름과 그리고 가을. 하지만 가을이 깊어 가면 페르세포네는 다시 땅을 떠나 사자(死者)들의 혼백이 머무는 지하의 세계, 하데스의 곁으로 가야만 한다. 홀로 남은 데메테르는 곧 외로움의 고통에 시름시름 앓는다. 그녀의 우울함에 땅은 황폐해지고, 모든 식물은 시들고 죽은 듯이 잠든다. 그리스인들에게 계절이 변하여 찬바람이 부는 것은 페르세포네와 데메테르의 이별 때문이었다. 데메테르의 우울에서 겨울의 혹독함은 비롯되는 것이었다.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이 이야기를 <변신이야기>(5행, 332~571행)에서 케레스와 프로세르피나의 사연으로 바꾸어 노래했다. 데메테르는 케레스로, 페르세포네는 프로세르피나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야기의 디테일도 바뀌었다. 그런데 오비디우스는 죽음의 신에게 좀더 인심을 썼다. 정확하게 말하면 공평했다고 할까. “유피테르(=제우스)는 형과 슬퍼하는 누이 사이의 중재자로 돌고 도는 일 년을 똑같이 둘로 나누었다. 이제 두 영역에 공통된 여신 프로세르피나는 일 년 열두 달 가운데 반은 어머니와 보내고, 반은 남편과 보내고 있다.”(564~7행) 겨울이 더 길어진 것이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 연구교수
죽음의 신이 짓는 음험한 미소

따뜻한 햇살에 얼었던 땅이 녹고 세상에 푸른빛이 감도는 걸 보니, 봄이 오는 모양이다. 페르세포네가 죽음의 세상을 나와 밝은 땅 위에서 데메테르를 만나는 까닭에. 대지의 여신이 행복해진 까닭에. 싹이 돋고 꽃망울이 터지며 새들이 노래하고 세상이 깨어난다. 그녀가 웃으니 햇볕이 따뜻하다. 그러나 심상치 않다. 이번 봄 풍경은 잔인한, 너무도 잔인한 허위인 것만 같다. 봄비가 내려도 상큼하지 않다. 맑은 공기를 맘껏 들이켜기가 겁난다. 혹시 죽음의 신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땅위로 홀로 보내지 않고, 그녀의 뒤를 따라 나온 것은 아닌가? 하데스, 그의 음험하고 스산한 숨결이 느껴진다. 하데스, 그의 다른 이름은 바로 플루톤! 은빛의 창백한 그의 손길이 봄을 맞은 대지를 온통 죽음으로 뒤덮을 것만 같은 불길함은 웬일인가? 원자번호 94번. 1940년,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의 에드윈 맥밀런은 죽음을 부르는 이 치명적인 물질을 처음 합성한 후, 죽음의 세계를 지배하는 플루톤의 이름을 따서 플루토늄이라 불렀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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