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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를 보고 슬퍼하는 레스비아의 모습을 그린 네덜란드 화가 알마 타데마의 작품.(그림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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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순정과 열정을, 온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이다.
‘제비’의 작업에 걸린 순진한 처녀도, 불륜에 빠진 순수한 로마 청년도 사랑 앞에 진실했다.
속고 속이는 사랑일지언정 누가 그들에게 죗값을 물을 텐가?
[고전 오디세이] 30. 로마 최고 팜므파탈과 순수청년의 사랑
1994년에 방영된 <서울의 달>이라는 드라마를 기억하는지. 가진 것이라고는 몸밖에 없었던 두 시골 청년이 서울의 한 달동네에서 성공을 위해 몸부림치는 이야기다. 한 청년은 주어진 몸을 최대한 굴려서 성공하려 했던 성실한 젊은이(최민식 분)였다. 반면, 다른 한 청년은 주어진 몸을 최대한 놀려서 성공하려 했던 제비족 젊은이(한석규 분)였다. 물론 가난하고 순박한 처녀(채시라 분)도 등장한다. 처녀에게 먼저 다가섰던 이는 성실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투박하고 서툴렀다. 결국 소위 ‘작업’의 전문가였던 제비 친구에게 도움을 청한다. 전문가는 역시 달랐다. 그가 던진 낚싯바늘을 순박한 처녀는 깊숙하게, 그것도 아주 제대로 물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랑은 제비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소위 ‘작업’이 그의 직업이었기에. 결국 제비는 처녀의 사랑을 외면하고 만다. 드라마는 이 대목에서 길게 늘어진다. 요즈음 같으면 광고 수입 때문이라 욕 좀 들어먹었을 것이다. 물론 단순히 밥 먹는 장면 따위로 길게 늘어진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순박한 처녀가 촛불만 하나 켜놓고 방에 앉아 눈물만 흘리는 장면으로 길게 늘어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장면이 압권이었다. 만약 이 장면이 없었다면, 이 드라마는 야망을 위해서 사랑을 희생하고 출세한 애인을 나중에 찾아가 복수하는 따위의 이야기로 전개되는 여느 삼류 드라마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처녀는 사랑을 외면했던 제비에게 복수는 물론 욕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하릴없이 눈물만 흘렸다. 사실 눈물 말고 다른 표출 수단이 없었기에. 실은 그게 다였다. 하지만 그게 드라마의 정수였다. 복수가 아닌 사랑, 혹은 사랑에 빠진 한 처녀의 절망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로마에도 이런 순박한 청년이 한 명 있었다. 카툴루스(기원전 84~54)라는 청년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향으로 유명한 베로나가 그의 고향이었다. 정치가로 출세시키기 위해 청년의 아버지는 그를 로마로 유학 보낸다. 청년이 맡겨진 곳은 당시 로마의 정계를 좌우했던 메텔루스의 집이었다. 그런데 청년은 그만 그 집의 여주인과 사랑에 빠져 버린다. 여주인은 클라우디아였다. 청년이 자신의 시에서 레스비아라 부른 소녀가 바로 그녀다. 누가 먼저 ‘작업’을 걸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유혹은 여주인이 먼저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로 말하자면, 로마 최고의 팜 파탈이었으니까. 키케로가 증인이다.
클라우디아야, 내가(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너의 더러운 몸을 씻어내라고 로마에 상수도를 설치한 줄로 아느냐? 네가 낯선 남자와 편하게 만나 너의 욕정을 달콤함으로 채워주기 위해 내가 로마에 넓은 도로를 깔아놓은 줄로 아느냐? (<카일리우스 변론>)
이런 연애 여장(女將)에게 카툴루스 같은 투박하고 순수한 시골 청년은 그야말로 신선한 사냥감이었을 것이다. 재치 있고 세련된 청년이었기에. 하지만, ‘작업’의 미끼를 먼저 던진 이는 청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표현이 나오기 때문이다.
참새야, 저 소녀를 가장 즐겁게 해주는 참새야/ 바로 너구나, 그녀가 함께 놀아주는 이가, 가슴에도 품어주는 이가 바로 너구나/ 사랑을 달라 갈망하는 너에게 콕콕 쪼아 달라 검지 손가락을 제일 먼저 내미는 이가 바로 너구나/ 내가 갈망하는 그녀에게 너는 사랑스러운 즐거움이었지/ 욕망의 불꽃 다음에 찾아오는 슬픔이 그녀를 짓누르면, 너는 그녀의 위안이 되어 그녀를 가볍게 해주었지/ 나도 그 비결을 알고 싶어, 나도 그녀처럼 되고 싶어/ 나도 너와 함께 놀고 싶어, 그러면 슬픔에 짓눌린 나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질 테니까(<시 2번>)
나름, 세련된 접근이다. 무턱대고 ‘들이대지’ 않는다. 대신, 그녀가 애지중지했던 참새의 애인이 되기를 희망한다. 참새가 도운 덕분일까? 그는 마침내 그녀를 낚는 데 성공한다. 연인들은 사랑의 정열에 불타오른다. 절정의 순간에 청년이 부른 노래다.
이렇게 살아요 우리, 나의 레스비아여! 이렇게 사랑해요 우리/ 고루한 노인네들의 소문일랑 무시해버려요/단돈 10원 가치도 안 나가는 소리잖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태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다시 뜨고 질 거예요/ 하지만 이 찰나의 순간을 비춰주는 이 빛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나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영원한 밤이 지배하는 어두운 잠뿐이에요/ 그러니 키스해주세요 천 번을, 이어 백 번을/ 또 다른 천 번을, 이어 또 다른 백 번을, 아니 멈추지 말아요/ 굳이 세어 보려 하지 말아요. 이렇게 수천 번의 키스를 하고 있는 우리를 훔쳐보고픈 자가 있거든, 세어 보라 하지요 뭐/ 세다가 세다가 셈에 빠져 우릴 질투하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게 해버리지요 뭐!(<시 5번>)
사랑에 대한 시인의 생각이 온전히 드러나는 노래다. 그에 따르면, 사랑이란 순간에서 영원으로가 아니라 영원에서 순간으로 이동하는 사건이다. 이는 또한 순간이 영원의 한 점이 아니라 실은 영원과 대등한 위치에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랑이 시인에게는 지고의 무엇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사랑은 불륜이었다. 그래서인지, 불륜에 대한 세간의 수군거림도 언급된다. 이런 이유에서였을까? 그의 시는 지금까지도 학교 교육에서 한번도 제대로 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다. 시인의 말대로, “고루한 노인네들의 소문”과 비난 탓이었다. 그 대표적인 노인네가 키케로였다. 욕을 들어먹을 만도 했다. 예컨대 그가 유혹했던 ‘참새’(passer)가 실은 남자의 성기를 뜻하는 말이니까. 이렇게, 시는 온통 음담패설투성이다. 하지만 그의 시는 기독교 교리가 엄격했던 중세를 거쳐 지금도 살아 남았다. 그 증거를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에서도 찾을 수 있다. <베사 메 무초>라는 노래가 그것이다. 이 노래는 시인의 “바시아 미히 물타 밀레”(basia mihi multa mille, 키스해주세요 수천 번을)에서 유래했다. 소리부터 유사하게 들릴 것이다. 도대체 이 끈질긴 생명력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일단 재미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로마 시대에는 카툴루스의 시보다도 더 선정적인 구경거리가 즐비했으니까. 검투 경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렇다면, 다른 데에서 찾아보자. 각설하고, 나는 저 생명력의 비밀이 시인의 순박한 사랑에 있다고 본다. 물론 여주인에게 그는 하룻밤 노리개에 불과했었다. 그도 처음엔 그녀를 거세게 비난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비난하진 않는다. 아니 못했다. 왜냐고? 그의 노래를 들어보자.
“오랫동안 가슴의 열정으로 불태운 사랑을 갑자기 그만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야/(…)/ 하지만 이 전쟁에서 어떻게 해서든 승리해야 해”(<시 76번>) 사람은 떠났지만, 사랑을 그만두는 일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녀에게서 받은 사랑 때문이라고 한다. 그 사랑을 마음으로부터 몰아내는 것은 진정 어려운 일이기에. 심지어 전쟁이라 표현한다. 나름 이겨 보려고 노력하지만, 이내 그는 “신들이시여! (중략) 제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듯이, 그녀가 나를 다시 사랑하도록 해 주소서”(<시 76번>)라는 기도를 통해서 이 전쟁에서 자신이 패배자임을 선언하고 만다.
이 선언을 하고 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폐렴에 걸려 요절한다. 서른 즈음의 나이에 말이다. 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지하 세계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만큼은. 자신의 가슴에 그녀가 남겨 준 사랑은 결국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면 시인의 시가 살아남게 된 비밀이 여기에서 풀릴지도 모르겠다. 시인이 사랑을 쾌락을 위한 놀이나 오락거리로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그에게 사랑은 한순간의 경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사랑을 욕망의 도구로 여겼다면, 그는 결코 그녀를 끝까지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순정과 열정을, 온몸과 온맘을 바쳤다. 이게, 그녀는 버렸지만, 그녀가 준 사랑은 그에게 남게 된 이유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사랑의 순정과 열정은 쉽게 잦아들지 않는 감정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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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원/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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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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