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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프시케)을 일깨우고 있는 에로스, 안토니오 카노바의 18세기 조각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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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열망과 절망을 그냥 견디는 카툴루스…
고통을 느끼며, 동시에 그것을 노래하는 시인.
그 노래가 바로 서정시이며 절망의 치료제였다.
고전 오디세이 (32) 에로스와 프테로스, 그리고 노래의 힘
이런 경험을 한 번쯤은 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말 한마디 못한 경험을. 이러한 장면을 잘 포착한 노래가 <몇 미터 앞에 두고>다. “마주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을 바로 몇 미터 앞에다 두고.” (김상배 <몇 미터 앞에 두고> 중에서)
고대 로마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노래한 이가 있다. 카툴루스(기원전 84년-54년)라는 청년이다.
“저 남자, 나에겐 신과 대등한 남자처럼 보이네/ 저 남자, 이런 말을 해도 된다면, 아니 신들을 능가하지/ 저 남자, 네 앞에 마주 앉아 너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너의 사랑스런 웃음소리를 듣고 있는 순간/ 가여운 나의 감각들은 모두 멈춰서 버리는데/ 너를 바라보는 그 순간, 레스비아여, 나에겐 어떤 생기도 남아있지 않게 되지/ … 혀는 굳어가고, 가녀린 불길들이 온몸으로 사르르 퍼져가며/ 퉁퉁대는 소리로 두 귀는 멍해지고/ 짙은 어둠이 내려 두 눈을 아득하게 만들어 버리기에.”(카툴루스 <시> 51번)
<몇 미터 앞에 두고>의 “마주 앉은 사람”은 카툴루스의 “저 남자”에 해당한다. “행복해 하는 모습”의 어느 연인은 레스비아다. 이런 경험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면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되는 현상이다. 어쩌면, 이런 보편적인 감정 표현의 닮음보다는 두 작품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차이가 실은 아주 미세한 순간에서 포착되기 때문이다.
이 노래의 절정은 “그 사람을 바로”라고 노래하는 순간에서 포착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몇 미터 앞에 있는데, 더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기에 안타까움과 애절함을 자아내는 순간이기에. 사랑하는 이가 마냥 행복해하기에 그냥 돌아섰다고 한다. 그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기에 나름 인간적이다.
카툴루스의 노래도 레스비아가 웃는 장면에서 절정을 맞는다. 레스비아가 행복해하는 모습이 포착되는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하지만 이 순간에 카툴루스는 레스비아에게서 돌아서지 않는다. 그는 그 순간에 그냥 머물러 있다. 차이는 여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 사람은 돌아섰지만, 다른 한 사람은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머묾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죽음이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이 시의 저작권은 카툴루스가 아니라 그리스의 여성 시인 사포(기원전 6세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머묾의 상태를 죽음이라 표현한다(사포 <시> 31번, “죽음이 임박했지요”). 한마디로 사포의 시는, 누군가를 사랑했는데 그 사랑이 혼자서 울부짖을 때에 나타나는 신체 현상에 대한 관찰을 담고 있다. 사랑의 열망이 내면의 심연에서 올라와 온몸을 휩싸고 지나가면, 차가운 절망의 냉기가 찾아온다고 한다. 이 냉기는 원래 열기였다. 그런데 열기보다 냉기가 더욱 강력하다. 절망에 빠진 사람의 숨을 멎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만들 정도이므로. 이런 현상이 절망의 상태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신체 현상은 정반대의 경우에도 일어난다. 사랑의 열기가 절정에 도달하는 순간에 이런 신체 징후가 자주 포착되기에. 플라톤이 그 증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볼 때, 땀을 흘리고 겪어본 적이 없는 열기가 구애하는 사람을 사로잡기 마련이네.”(<파이드로스> 중) 플라톤은, 이런 현상을 만드는 힘을 히메로스(himeros)라고 부른다. 이는 우리말의 열망(熱望)에 해당한다. 다시 플라톤의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어지면, (중략) 영혼은 침에 쏘인 듯이 매우 큰 고통을 느끼지. 그러다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상기하고, 다시 환희를 느끼지. 고통과 환희로 뒤섞인 영혼은 온통 감정의 혼란함에 괴로워 길을 잃고 미쳐버리지. 이런 광기에 사로잡힌 영혼은 밤에는 잠에 들지 못하고 낮에는 한자리에 머물지 못하며 갈망에 사로잡혀 사랑하는 이가 머물 만한 곳을 찾아 달려가지.” (<파이드로스>중) 열망과 절망으로 생겨난 신체 현상들의 징후가 같다는 점이 흥미롭다. 어쩌면, 이런 의미에서 사랑(Eros)과 죽음(Thanatos)은 서로 짝패일 것이다. 그런데 사랑과 죽음이 서로 맞서면, 죽음을 선택하려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사랑을 선택하려 들 것이기에. 문제는, 죽음 대신에 선택한 사랑의 결실이 대개는 한 순간의 육체적 쾌락이라는 점이다. 이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 이가 대표적으로 플라톤이다. 그는 사람들이 에로스 신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육체적 사랑을 돌보는 것이 에로스의 기본 업무이지만, 에로스 신의 핵심 직분은 “지혜에의 사랑(philosophia)”을 돌보는 것이라고 플라톤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것은 “사랑하는 사람” 때문이지만, 실은 그 사람에 담긴 아름다움 덕분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의 증거로 그는, 이별이 찾아오면, 사람은 사랑했던 사람을 상기하려 노력한다는 사실을 내세운다. 이런 상기가 가능한 것은 사랑했던 사람이 구애하는 사람의 눈에 남긴 아름다움이, 아름다움(to Kallos)의 대분류 표지 아래에, 플라톤의 말을 빌면 이데아에 분류되어 기억의 저장소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상기와 기억의 차이가 분명해진다. 상기(anamnesis)는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추억이지만, 기억(mnemosyne)은 아름다움이라는 이데아를 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매개 과정을 통해서 플라톤은 에로스를 육체에의 사랑으로부터 지혜에의 사랑으로 끌어올린다. 육체적 사랑에의 추억은 그 자체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지기에. 따라서 기억은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현재의 활동이 된다. 이데아의 세계로의 비상이 기억이기에. 이런 이유에서 플라톤은 에로스에게 프테로스(Pteros)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다. 프테로스는 지혜(이데아)의 세계로 날아오를 수 있도록 인간의 영혼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신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플라토닉 러브”라고 알려진 “지혜에의 사랑”을 돌보는 프테로스 신은 탄생한다. 그렇다면, 프테로스는 절망으로 “거의 죽어가는” 카툴루스를 구원할 수 있을까? 그는 절망의 고통을 그냥 견딘다. 그의 고집은 참으로 알아줄 만한데, 또 다른 노래를 들어보자. “미워하고 사랑한다. 내가 왜 이러는지, 넌 묻겠지. 나도 몰라, 하지만 그것을 느끼고 있고 나는 두 조각으로 갈라지고 있어.”(카툴루스 <시> 8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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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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