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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9.30 20:23 수정 : 2011.09.30 20:23

살바도르 달리가 그린 예수 수난의 모습.(왼쪽) 아리스토텔레스의 조각상.

고전 오디세이 41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탐욕과 더불어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속에는 방탕이 있었다. 이것은 ‘아크라시아(akrasia)’를 옮긴 말인데, 방탕은 물론, 방탕의 원인인 ‘자제력이 없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개념은 ‘위선’과도 직결될 수 있는 의미망을 가지고 있다.

작은 동네 나사렛에 살던 예수가 마침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그곳 성전에 들어갔을 때, 예수는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만인이 기도하는 성전이 신의 이름을 팔아서 돈벌이하는 시장터로 전락했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폭정과 질병, 가난에 고통 받던 사람들을 위한 영혼의 안식처가 아니었다. 그들의 아픔을 악용해 돈을 빨아먹는 “강도의 소굴”로 변질되어 있었다. 그 소굴을 주름잡는 강도는 종교 지도자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은 허울 좋은 말로 신의 율법을 전하면서 십일조와 예물을 강조했지만, 사회를 위한 정의와 약한 자들을 향한 연민, 신에 대한 신실한 믿음은 내던져 버렸다. 입으로는 종교적 덕목을 외쳤지만, 그들은 실천하지 않았다. 그들을 향해 예수는 질타했다. “천벌을 받아 마땅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위선자들이여! 그대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닦지만, 그 속엔 탐욕과 방탕이 가득 차 있구나.”(<마태복음> 23:25)

성전의 뜰에서 물건을 사고팔며, 돈을 바꿔주고, 제사 예물로 쓰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배후에는 경건한 척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탐욕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예수는 그것을 직시했다. 참된 신앙(pistis)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이 속에 깃들어 있는 신실한 마음과 경건한 품성을 오롯이 드러내는 투명함에서 입증되는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런 투명함이 없는 위선자들이었다.

탐욕과 더불어 종교 지도자들의 마음속에는 방탕이 있었다. 이것은 ‘아크라시아(akrasia)’를 옮긴 말인데, 방탕은 물론, 방탕의 원인인 ‘자제력이 없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래 이 말은 ‘힘’을 뜻하는 ‘크라토스(kratos)’에서 나왔다. 이 말에다 ‘박탈’을 뜻하는 접두사 ‘아(a-)’가 붙어서 아크라시아가 되면, 누군가를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없음’을 가리키는 한편, ‘자제력 없음’을 뜻하기도 한다. 이 마지막 뜻이 예수의 비난과 연결된다. 이 개념은 방탕함에 그치지 않고, 예수의 비난에서 볼 수 있듯이, ‘위선’과도 직결될 수 있는 의미망을 가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 고전기 아크라시아는 당시 철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는 도무지 아크라시아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누구든지 좋은 것인 줄 알면, 행한다. 행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좋은 줄 모르기 때문이다. 좋은 줄 알면서 어떻게 행하지 않겠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특별히 의지가 약하거나 자제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알면서도 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몰랐기 때문에 행하지 않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맥락에서 아크라시아를 이해했고, 그것이 비논리적이라고 거부했다.

예를 들어 골초가 담배를 끊으면 건강에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금연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자제력이 없어서다. 우리 곁에서 흔히 목격하는 이런 상태가 바로 아크라시아인데, 소크라테스는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현재 하고 있는 일보다 다른 것이 더 좋으며 또 실현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거나 생각한다면, 어떤 사람도 (현재 하는) 그 일을 계속하지는 않을 거야.”(플라톤, <프로타고라스> 358b)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골초가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은 의지력이 약하거나 자제력이 없기 때문이, 즉 아크라시아 때문이 아니다. 흡연이 건강에 나쁘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참된 지혜(sophia)를 갖추면, 그는 틀림없이 금연을 실천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윤리적인 문제는 의지나 자제력의 문제가 아니라, 참된 지혜와 지식의 문제다.

이와 같은 윤리적 주지주의 입장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잘 요약해준다. 그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그 누구도 최선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만약 최선의 것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좋은 줄 알면서도 자제력이 없기(=아크라시아)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최선임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의문을 제기한다. 사람들은 정말 좋은 줄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일까?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는 정말 없을까?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에게 담배의 해독성을 정확하게 알려주어 올바른 지식을 갖게 한다면, 그는 정말로 담배를 끊을 수 있을까? 신자들이 바친 헌금과 예물을 자기 주머닛돈이라도 되는 듯 쓰는 종교 지도자는 신의 뜻이 무엇이며, 어떤 자세로 교회나 사찰의 재정을 운영해야 하는지 정확한 정보와 지식이 없어서 탐욕스런 행동을 그치지 못하는 것일까? 정의 실현을 외치는 정치가들이 정말로 올바른 일이 무엇이고 국민들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숱한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소크라테스의 생각대로, 그들 모두가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제대로 행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는 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런데 또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이런 문제들을 풀려는 지난한 노력의 결과다. 그는 우선 소크라테스가 거부한 아크라시아를 인정했다. 상식에 잘 맞는 선택이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알면서도 못한다고 느끼니까. 안다고 해서 딱히 잘 행동할 것 같지도 않고. 특히 많이 배우고 학력 좋고 똑똑한 사람들이 훨씬 더 유능하게 불의를 저지르면서도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거뜬한 것을 보면서, 사람의 인격이 중요한데 많이 배워야 정말 소용없구나 하는 허탈감과 공분(公憤)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같은 상식에 기초를 둔 윤리학을 구상했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그는 먼저 올바른 행동을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는 주장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앎은 학문적인 인식(episteme)과 기술적인 지식(techne)과는 다른 특별한 것, 즉 실천을 위한 지혜(phronesis)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구분한 앎의 여러 종류들 가운데 실천적 지혜란, 특정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무엇이 좋고 나쁘며, 유익하고 해로운가를 판단하는 앎과 올바른 의견을 형성할 줄 아는 탁월성과 관련된다. 이것이 없다면, 누구나 아크라시아에 빠질 수 있다. 아크라시아에 빠진 “자제력이 없는 사람(akrates)은 자기가 하는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pathos) 때문에 그것을 하는 반면, 자제할 줄 아는 사람(enkrates)은 자기가 품은 욕구가 나쁘다는 것을 알면 이성에 의해 그것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문제는 바로 실천적 지혜, 즉 프로네시스다.

프로네시스가 없다면, 아크라시아는 고개를 쳐들고, 위선의 행태가 드러난다. 정의와 사랑, 믿음이 인간에게 좋은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던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처럼. 하지만 이건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수가 이 시대에 다시 나타난다면, 그는 우리를 향해 무엇이라고 할까? 아크라시아가 만연한 시대, 우리에게 프로네시스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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