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0.28 20:39
수정 : 2011.10.28 20:39
고전 오디세이 43 에우가몬의 ‘텔레고네이아’
아버지가 죽자 두 아들이 아버지의 두 아내와 교차 결혼을 한다? ‘춘향전’이 갖춘 권선징악의 짜임새에 윤리적으로 안도하는 우리에겐 그런 불온한 상상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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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의 1545년 작품<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트로이아 전쟁을 끝내고 10년간의 방랑 생활 끝에 고향 이타카로 돌아온 오디세우스가 페넬로페와 침대에 앉아 서로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위)
막스 베크만의 1943년 작품 <오디세우스와 칼립소>. 표류하던 오디세우스는 칼립소가 살던 오기기아 섬에 도착하여 7년간 그녀의 남편 노릇을 하지만, 페넬로페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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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이 <오디세이아>에서 나왔다고? 이런 주장은 두 작품이 비슷한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온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아 전쟁에 나설 때, 그는 신혼이었다. 정숙하고 지혜로운 미인 페넬로페가 아내였고, 둘 사이에는 아들도 있었다. 이름은 ‘멀리서(Tele) 벌어지는 전쟁(Machos)’이라는 뜻의 텔레마코스였다. 전쟁은 10년간 지속되었다. 트로이아 목마를 앞세운 오디세우스의 지략에 힘입어 그리스 연합군은 승리를 거두었다. 문제는 귀향이었다. 전쟁이 끝났지만 오디세우스는 곧바로 고향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포세이돈의 저주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데 무려 10년이나 걸렸다. 그사이 고향 이타카 섬에는 오디세우스가 죽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페넬로페를 노리고 주변의 남자들이 몰려들었다. 더는 오디세우스를 기다리지 말고 재혼을 하라고 압박했다. 텔레마코스가 권력을 계승하기 전에 왕권을 가로채려는 흉악한 속셈이 있었다. 구혼자들의 위협에 맞서 페넬로페는 끝까지 정절을 지키며 오디세우스를 기다렸다. 마침내 도착한 오디세우스는 그녀를 괴롭혔던 구혼자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춘향전>의 줄거리와 참 유사하다. 오디세우스는 이몽룡, 페넬로페는 춘향이, 구혼자들은 변학도로 바꾸면 얼추 비슷하다. 하지만 서양고전학자든 국문학자든 이 두 작품의 직접적인 관계를 공식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직 없다. <오디세이아>는 기원전 9세기께 고대 그리스의 작품인 데 반해, <춘향전>은 18세기 조선시대 작품이니 둘을 직접 연결시키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고전 오디세이’를 함께 쓰고 있는 안재원 박사는 사석에서 <춘향전>이 <오디세이아>에 뿌리를 둔다고 주장하곤 한다. 고대 그리스와 한반도 사이에 있는 여러 문화권에서 그 비슷한 이야기들이 발견되는데, 그것들을 시대순으로 잘 연결하면 두 작품 사이의 계보학적인 연계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가설이 실증되려면 구체적 자료들이 더 많이 필요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흥미로운 연구 주제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와 페넬로페를 구한 오디세우스는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라는 식의 해피엔딩이 예상된다. <춘향전>의 순애보가 이몽룡의 입신양명과 두 사람의 백년해로로 아름답게 끝맺음되듯이.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의 이야기는 어떤가? 오디세우스는 여신 칼립소의 유혹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온 영웅이다. 여신이 오디세우스에게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게 해주겠다고 제안하는데도, 그는 거절한다. “고귀한 여신이여, 그 때문에 제게 노여워 마소서. 저 자신도/ 그 모든 걸 잘 압니다. 사려 깊은 페넬로페가 그대보다/ 외모로도 체구로도 마주 앉아 보기에 훨씬 못하다는 사실을./ 실로 그녀는 죽기 마련인 존재지만, 그대는 죽지도 늙지도 않을 존재니까요./ 하지만 그토록 저는 날마다 바라며 그리워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귀향의 날을 볼 수 있기를.”(<오디세이아>)
그래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는 페넬로페와의 백년해로로 끝났을까? 우리에겐 <춘향전> 이후가 없지만, 그리스 인들은 <오디세이아> 이후를 상상했다. 그것은 호메로스가 암시하는 해피엔딩과는 전혀 딴판이다. 호메로스 작품에는 오디세우스가 포세이돈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집에 도착하여 구혼자들을 처단한 후에 다시 집을 떠나야만 한다는 예언이 나온다. 하지만 포세이돈을 달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그의 불행은 끝나고 백성들을 평화롭게 다스리면서 안락하게 늙어가고 더없이 부드러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했다.(<오디세이아>) 그러나 호메로스 이후의 작가들은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에 관한 불량한 소문들을 지어냈다. 기원전 2세기께, 아폴로도로스는 <신화집>에서 그 불온한 이야기들을 요약해준다. 페넬로페는 호메로스가 그린 것처럼 정숙한 여인이 아니었단다. 그녀는 구혼자 가운데 안티노오스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를 알게 된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를 친정으로 쫓아냈단다. 그보다 더 끔찍한 소문도 있다. 페넬로페가 구혼자 가운데 암피노모스와 정분이 났던 것을 알게 된 오디세우스가 그녀를 죽였다는 것이다. 이몽룡이 남원으로 돌아와 변학도를 혼내주고 춘향을 구하고 보니, 그녀는 이미 다른 남정네들과 정분이 나 있었다는 꼴이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에게 그렇게 엄격할 자격이 있을까? 일단 그는 귀향하는 길에 아이아이에 섬에서 키르케에게 잡혀 1년 동안 그녀의 남편 노릇을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기기아 섬에 도착해서는 7년 동안 여신 칼립소의 남편 노릇을 하며 지낸다. 귀향길 10년 동안 고생하며 떠돌았다고는 하지만, 그 가운데 8년을 요정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며 잘 지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호메로스가 전해준 예언대로 오디세우스는 구혼자들을 죽이고 난 뒤, 포세이돈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길을 떠나는데, 아폴로도로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신을 달랜 후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단다. 그는 테스프로도스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 도착하여, 그곳의 여왕 칼리디케와 결혼을 하고 아들까지 낳았단다. 대단한 역마살에 못 말릴 난봉 아닌가! 이런 오디세우스가 과연 20년 동안 기다렸던 페넬로페의 실수를 그렇게 혹독하게 징계할 수 있을까? 물론 페넬로페의 부정은 호메로스 이후에 지어낸 소문일 뿐이다.
그러나 정말 뜻밖의 상상력은 서기 5세기께에 프로클로스가 남긴 문헌 <쓸모 있는 이야기 선집>에서 나타난다. 그는 호메로스 이후에 에우가몬이라는 시인이 <텔레고네이아>라는 작품을 썼다며, 그 내용을 요약해준다. 테스프로도스 사람들과 지내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외지에서 온 청년과 다투다가 그의 창에 찔려 죽게 된단다. 죽어가는 오디세우스에게 청년은 자신의 이름이 텔레고노스며, 어머니는 키르케인데, 아버지를 찾아 이타카까지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찾던 아버지가 바로 오디세우스인 것이다. 이렇게 오디세우스는 ‘먼곳에서(Tele) 낳은(Gonos)’ 아들 텔레고노스의 손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단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 후 텔레고노스는 오디세우스의 왕궁으로 찾아가 페넬로페와 이복형인 텔레마코스를 만나고, 그들을 데리고 고향인 아이아이에 섬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곳에서 텔레마코스는 의붓어머니인 키르케와 눈이 맞아 결혼을 하게 되고, 그에 짝을 맞추어 텔레고노스는 페넬로페와 결혼을 한단다. 아버지가 죽자 두 아들이 서로 상대의 친모, 즉 아버지의 두 아내와 교차 결혼을 한다? 이 정도의 막장 드라마가 또 있을까 싶다.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의 완결판이다. <춘향전>이 갖춘 권선징악의 짜임새에 윤리적으로 안도하는 우리에겐 그런 불온한 상상력은 언감생심이다. 설령 그런 상상력으로 지어진 이야기가 있었더라도, 우리의 역사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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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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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역사도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불후의 고전으로 전해주는 반면, <텔레고네이아>를 비롯해서, 그밖에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에 관한 불량한 상상을 삭제하려고 했다. 역사는 무엇을 고전으로 남기고 무엇을 폐기하려는 것일까? 작품성, 아니면 도덕성이 기준인가? 비슷한 맥락에서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인간의 삶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라면, 역사는 어떤 삶을 기억하고 어떤 삶을 삭제하려는가? 또 묻는다.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인가, 삭제되어 마땅한 삶인가? 행여 더러운 삶을 살면서도 올바른 삶을 사는 양, 교묘한 말솜씨로 치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일그러진 삶을 살면서도 정의로운 이야기와 명분에만 열광하는 척하는 것은 아닌가? 불온한 이야기가 불편한 이유를 깊이 생각해본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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